버스에서 노인이 쓰러졌을 때, 나는 0.3초 동안 주변을 살폈다.
나만 보는 건지. 다들 보는 건지. 내가 먼저 일어나야 하는 건지.
그 0.3초가 끝나고 나서야 몸이 움직였다. 집에 돌아와 그 장면을 다시 떠올렸을 때 불편했던 건, 내가 도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내가 계산했다는 사실이었다.
1964년, 뉴욕 퀸스의 한 골목에서 키티 제노비스가 살해당했다.
38명의 이웃이 창문 너머로 그 장면을 목격했다.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언론은 이것을 현대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보도했고, 사람들은 분노했다. 나라면 달랐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런데 심리학자 존 달리와 빕 라타네는 실험을 통해 다른 답을 찾아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개인이 느끼는 책임감은 줄어든다. 이것을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라고 한다. 이건 나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 즉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나는 그 0.3초 동안 정확히 그 실험 속 피험자였다.
뇌는 도덕적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전두엽이 손상된 환자들을 연구하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감정이 마비된 사람들은 도덕적 판단도 함께 무너졌다. 우리가 "이성적 판단"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실은 감정의 안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체표지 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이라고 한다.
즉, 우리가 "나는 옳다"라고 느끼는 그 확신의 근거도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감정은 빠르고, 강렬하고, 자신이 옳다는 방향으로 편향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에게 고백하지 않는다. 자신이 감정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나쁜 사람이 따로 있다고 믿었다.
저 뉴스 속 사람. 저 댓글을 쓰는 사람. 저 회의실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나는 저렇지 않다고. 그 믿음이 얼마나 편안했는지, 그 편안함 자체가 이미 증거였다는 걸 한참 뒤에 알았다.
심리학에서 도덕적 허가 효과(moral licensing)라고 부르는 게 있다. 선한 일을 한 번 하고 나면 뇌는 장부를 정산한다. 이번 주 좋은 일을 했으니까, 이 말은 해도 된다. 오늘 기부를 했으니까, 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봉사활동을 마친 날 유독 가족에게 날이 서있었던 적이 있다면, 그게 바로 그 효과다.
선함이 면죄부가 되는 순간을,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을 방청하고 충격을 받았다.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 수백만 명의 학살을 집행한 그 남자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평범한 관료였다. 명령에 복종했고, 서류를 처리했고, 자신의 일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렌트는 이것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 불렀다.
가장 무서운 악은 악의가 없다.
나를 위한다는 말로 숨 막히게 하는 사람. 옳다는 확신으로 타인의 선택을 지워버리는 사람. 원칙을 지킨다는 이름으로 누군가를 체계적으로 지워가는 시스템.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은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가족을 사랑하고,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잠든다.
악인의 얼굴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많이 다르게 생겼다.
SNS는 감정을 증명해야 하는 세계를 만들었다.
애도는 검은 프로필이 되고, 분노는 공유 횟수가 되고, 공감은 좋아요로 환산된다. 기록되지 않은 감정은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철학자 기 드보르는 1967년에 이미 이것을 예언했다. 그는 현대 사회가 스펙터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삶이 이미지의 축적으로 대체되는 사회. 우리는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전시한다.
보드리야르는 한 발 더 나갔다. 이제 우리는 원본보다 복사본을 더 진짜라고 느낀다고. 시뮬라크르(simulacre). 내가 슬프다고 쓴 게시물이, 실제로 슬퍼하는 나보다 더 실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어느 날 나는 진짜로 슬픈 건지, 슬프다고 말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창밖에 비가 오고 있었는데, 그 비를 보면서 내가 실제로 무언가를 느끼는 건지 아니면 느끼는 척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경계가 흐려지는 감각이 서늘했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피해자다
이것이 문제다.
아무도 가해자가 되지 않는 세상에서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책임자만 사라질 뿐이다. 모두가 자신의 한계까지 참았다고 믿는다. 모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기억한다. 모두가 더 많이 받았어야 했다고 느낀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자기중심 편향(egocentric bias)이라 부른다. 우리는 자신의 기여는 과대평가하고 타인의 기여는 과소평가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공동 프로젝트에서 각자가 느끼는 자신의 기여도를 합산하면 언제나 100%를 초과한다. 거짓말이 아니다. 뇌의 구조다.
그 기억들이 전부 진짜라는 것. 그것이 이 상황의 핵심이다.
타인의 터짐은 폭력이고, 나의 터짐은 한계다. 이 비대칭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이해하면 내 서사가 흔들릴까 봐 이해하지 않는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인의 얼굴을 진짜로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고. 얼굴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죽이지 말라"는 가장 원초적인 호소다.
그런데 SNS는 얼굴을 프로필 사진으로 만들었다. 우리는 얼굴 없이 서로를 판단한다. 닉네임 뒤에, 아이디 뒤에, 캐릭터 이미지 뒤에 숨은 사람에게 우리는 레비나스가 말한 책임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더 쉽게 찌른다.
익명성이 악을 만드는 게 아니다. 익명성이 원래 우리 안에 있던 것을 꺼낸다.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딱 하루,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그대로 볼 수 있다면.
배려한다고 생각한 말이 상대에게 얼마나 무거웠는지. 솔직했다고 믿은 말이 얼마나 무례했는지. 선을 지켰다고 안심한 그 순간, 누군가 내 선 바깥에서 혼자 서 있었는지.
아마 하루도 못 견딜 것 같다.
철학에서는 이것을 인식론적 겸손(epistemic humility)이라고 부른다. 내가 아는 것의 한계를 아는 것. 그런데 그 겸손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용기의 문제다. 자신이 틀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진짜로 열어두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신경과학자들은 자기 인식이 높아질수록 행동이 오히려 마비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너무 선명하게 보는 사람은 움직이지 못한다. 적당한 자기기만이 있어야 내일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 수 있다.
우리의 무지는 순진함이 아니다. 생존이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리지 않기로 했다.
비판은 언제나 쉽다. 손가락을 드는 것도, 그 손가락이 나를 향하지 않도록 방향을 조정하는 것도 우리는 매우 능숙하다.
어려운 건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면서 "이건 나 말고 저 사람 얘기"라고 느끼는 그 감각을, 딱 1초만 멈추고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도 나도, 우리는 모두 자신이 옳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의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