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었다는 것을

by 슈펭 Super Peng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는 꽤 늦게 알았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오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며 살아왔을까.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먼저 사과하고, 불편한 자리에서도 웃고, 싫다는 말 대신 "괜찮아"를 입에 달고 살았다. 착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뿌듯했다. 그게 나를 서서히 갉아먹는 말인 줄도 모르고.

그 말은 칭찬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사람은 싫다고 하지 않는다"는 관찰의 다른 이름이었다.


심리학자 크레이그 말킨은 나르시시즘의 반대 극단에 에코이즘(echoism)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코는 헤라의 저주를 받아 타인의 말만 반복하다 형체를 잃었다. 에코이스트는 꼭 그와 같다. 자신의 욕구를 지우고 타인의 필요를 먼저 채운다. 문제가 생기면 반사적으로 자기 탓부터 하고, 칭찬을 받으면 오히려 불편해하며, 자신이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한다.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을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소비한다면, 에코이스트는 스스로 거울이 되어 소멸을 자처한다. 존재하되, 비추기만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분석가 도널드 위니캇이 오래전에 명명한 개념과 마주친다. 위니캇은 인간에게 두 종류의 자아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참 자기(True Self)'자신의 충동과 욕망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자발적 존재. 다른 하나는 '거짓 자기(False Self)'환경의 요구에 순응하기 위해 구축된 방어 구조물이다. 착한 아이라는 역할을 너무 일찍, 너무 오래 수행한 사람은 거짓 자기를 참 자기로 착각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이 진심으로 타인을 위한다고 믿지만, 실은 오래전에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가면을 얼굴로 착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격이 아니다. 학습된 생존이다.

발달심리학자 존 볼비의 애착 이론은 이 지점을 더 선명하게 설명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애착 대상과의 정서적 연결을 통해 생존한다. 유아에게 양육자의 반응성은 생사의 문제다. 만약 감정을 표현할 때마다 양육자가 불편해하거나, 관계가 흔들리거나, 침묵이 돌아왔다면 아이는 하나의 공식을 내면화한다. '내 감정은 위험하다. 감추는 것이 안전하다.' 이 공식은 의식적으로 학습되지 않는다. 뼛속 깊이, 신경계 수준에서 각인된다.


뇌과학은 이것을 더 냉정하게 설명한다. 뇌의 전대상피질(anterior cingulate cortex)은 사회적 거절을 신체적 통증과 동일하게 처리한다. 누군가에게 "아니요"를 말했다가 거부당하는 것은 뇌에게 있어 문자 그대로 아픈 일이다. 여기에 더해, 만성적인 눈치와 자기 억압은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지속적 분비를 유발한다. HPA 축(시상하부 뇌하수체 부신 축)이 장기간 과활성화된 상태는 면역계를 교란하고 해마의 뉴런을 손상시킨다. 자신을 지우며 살아가는 것은 심리적 고통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천천히 몸을 갉아먹는 생리적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른이 된 후에는 왜 달라지지 않는가.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유기 공포(abandonment fear)라고 부른다. 편도체가 "이 사람마저 떠나면 혼자가 된다"는 경보를 울리는 순간, 이성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피질의 기능은 현저히 저하된다. 이것이 우리가 알면서도 붙잡는 이유다. 이 관계는 나를 소모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편도체의 비명이 전전두피질의 논리보다 먼저, 더 크게 울린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자유의 문제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 내던져진 존재라고 했지만, 공포가 임계점을 넘어선 인간은 그 자유를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자유를 감당하는 것보다 굴레 안에 머무는 것이 덜 무서울 때, 우리는 관계의 포로가 된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 중 하나로 복수성(plurality)을 제안했다. 우리는 단 한 사람 앞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고유한 자기 자신이 된다. 삶의 모든 에너지를 한 사람에게, 혹은 하나의 관계에만 쏟아붓는 순간, 우리는 그 한 사람의 시선이라는 단일한 소실점 안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아렌트에게 복수성은 단순히 다양한 인간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여러 다른 타자들 앞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현현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자아의 풍요로움을 의미한다. 느슨하지만 다양한 관계가 자유의 조건이라는 것은 냉소가 아니라 실존적 진실이다. 한 종류의 뿌리만으로는 어떤 나무도 폭풍을 버티지 못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는다. 나는 왜 세상을 이렇게 읽어왔는가.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뇌가 세상을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기관이 아니라고 말한다. 뇌는 기억과 감정이 설계한 예측 모델을 현실 위에 투사하는 능동적 장치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역사가 채색한 해석이다. 과거에 배신당한 경험은 현재의 타인 위에 그 배신자의 얼굴을 덧씌운다.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는 사람에게서 나는 이미 떠난 누군가의 그림자를 찾는다. 이것은 뇌가 작동하는 방식 그 자체다.


그렇다면 성격은 바꿀 수 없어도, 렌즈는 갈 수 있다.


인지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재구성(reframing)이라고 부르고, 불교 철학에서는 정견(正見)이라는 수행의 언어로 표현한다. 두 전통은 말이 다를 뿐 가리키는 방향은 같다. 사건 자체는 변경할 수 없지만, 그 사건을 어떤 맥락 안에 배치하느냐는 여전히 나의 몫이다. 이것은 자기기만이 아니다. 해석의 주권을 되찾는 일이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자아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공연적 주체(performing self)'로 파악했다. 우리는 상황마다 다른 자아를 연기한다. 신입일 때는 경청하는 내가 되고, 리더가 되면 이끄는 내가 된다. MBTI 유형이나 성격 검사 결과가 '나의 본질'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것은 내가 지난 몇 년간 살아남기 위해 가장 자주 선택한 사회적 얼굴일 가능성이 높다. 융(Carl Jung)은 이것을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사회적 역할을 위해 쓰는 가면. 문제는 가면을 너무 오래 쓰면, 그것이 진짜 얼굴인 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면 뒤에는, 오랫동안 억압된 그림자(shadow) 분노와 욕망과 거절의 언어들을 조용히 응어리지고 있다.

착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은 나의 가장 견고한 페르소나였다. 그 안에서 나는 화를 낼 수 없었고,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내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사치처럼 여겼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감정에 언어를 부여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감정을 다룰 수 없다. 이름 없는 것은 붙잡을 수 없다.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드 콩디악은 언어가 감각을 명료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언어는 단순히 이미 있는 생각을 옮기는 도구가 아니라, 형태 없는 감각에 윤곽을 부여하는 인식의 구조물이다. "나는 지금 속상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속상함은 비로소 내 것이 된다. 내 것이 되어야 다룰 수 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가장 쉽게 다가오는 상대는, 능력 있고 성실하지만 자기 자신의 가치를 오직 타인의 평가로만 확인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인정이라는 휘발성 통화로 환전하려 하는 사람. 그 빈틈을 타고 누군가는 들어온다. 비어있는 자리는 반드시 무언가로 채워지기 마련이고, 자기 자신을 먼저 채우지 않은 사람에게 그 자리를 결정할 권리는 종종 타인에게 넘어간다.

그래서 이제는 연습하려 한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내 모습에 "나 제법인데"라고 말해주는 것. 내 감정에 정확한 이름을 붙여주는 것

지쳤다, 서운하다, 화가 난다. 누군가의 무리한 요구에 "그건 나한테 좀 힘들어"라고 말하는 것.

뇌는 가소성을 지닌다. 신경 회로는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재구성된다. 오래된 생존 전략은 더 이상 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다고 뇌에게 반복해서 알려주는 일


그것이 바로 변화다. 크고 극적인 선언이 아니라, 매일의 작고 구체적인 선택들로 이루어지는 변화.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칭찬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오래 믿어온 것을 내려놓는 일은 언제나 그렇다. 그러나 늦었다는 말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가면은 벗을 수 있다. 렌즈는 갈 수 있다. 그리고 언어는,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오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그건 나한테 좀 힘들어"라고 말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한 문장이,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아주 조금 열어놓는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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