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캄 보 디 아
대학교 때부터 붙어 다니던 30년 지기 친구들과 캄보디아 여행을 갔다. 네 명 중 한 명이 여행을 많이 다녀 본 지라 항공권부터 숙박, 식당까지 다 알아보았다. 이럴 경우 해외 여행지 선정에 있어서 선택권이 가장 큰 사람은 단연 여행 계획을 짜는 친구이다. 본인이 가고 싶어 하는 장소의 코스를 짤 때 적극성은 그렇지 못한 곳을 계획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것이다. 나머지 친구들은 정해진 코스를 잘 따라가 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리라.
캄보디아에는 사원이 많았다. 뱅밀리아 사원은 솔직히 사원이라고 말하기도 좀 그랬다. 앙코르와트의 사원들이 다 고대적 건물들이라 세월의 흔적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뱅밀리아 사원의 건물들은 제대로 모양을 갖춘 것이 거의 없었다. 터만 남아 있거나 반쯤 부서진 건물, 상상 속에서 다시 건물을 세워보지 않고는 거기가 유적지인지조차 헷갈렸다. 무너진 돌덩이 하나하나 버리지 않고 부서진 그대로 간직한 정신이 위대했다. 현재가 과거를 존중하는 마음, 과거에서 현재로 연결되는 느낌. 젊은 시절 때, 과거는 되도록 잊어버리는 게 낫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특히 슬펐거나 힘들었던 과거는 현재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현재만 열심히 살면 된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옛날 사진 버리는 것도 개의치 않았던 때. 하지만 나이가 들고 앙코르와트 사원 한 가운데 서 보니 감회가 달랐다.
몇 년 전 라디오 팟캐스트에서 어느 교수가 한 말이 기억났다. 앙코르와트 사원들은 지나간 옛사랑을 닮았다고. 한 시절 눈부실 만큼 찬란하고 위대했으나, 이제는 빛바랜 옛 흔적들만 쓸쓸히 남아 과거를 품고 있는 건물들이 누구나 마음에 품고 있는 옛사랑과 꼭 닮았다고.. 앙코르와트에 와서 매혹적인 사원들의 벽 색깔들을 보니 울컥해졌다. 나의 인생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도 떠올랐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옛사랑의 비밀을 사원 벽의 틈 사이에 말하고 흙으로 덮는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 보던 기억과 함께 사원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언저리를 계속 서성거렸다. 따뜻한 햇살 같기도 하고 눈물 섞인 폭풍 같기도 했던 젊은 시절을 함께 지나온 친구들이었기에 그 서성임을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우리는 저마다 가슴속에 커다란 옛 사원 하나씩 품고 사는 게 아닐까. 언젠가 그 속에서 옛 연인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까 싶어 문을 닫지 못한 채 한 번씩 빼꼼히 들여다본다.
나무들에 둘러싸여 언제 무너져 내릴지 위태로운 타프롬 사원, 신비의 문을 열고 과거로 들어가 세월의 흐름 속에 둘러싸인 사원들과 나무들을 꾹꾹 눌러 눈에 담아본 풍경, 거대한 불상들이 새겨져 있는 미로 같은 바위들 사이사이를 지나며 종교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꼈던 바이욘 사원, 그렇게 캄보디아의 사원들은 하나하나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저녁마다 나갔던 재래시장에서 기념품, 옷 등의 가격을 깎아가며 하나하나 사던 재미도 잊을 수 없다.
여행은 어느 장소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던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해외여행은 모든 장소가 새로운 장소이니 주변 사람의 영향을 받기보다 내가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게 중요하지, 동행한 사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과 패키지 여행도 갈 수 있다고 여긴 내 생각이 바뀐 것에는 친구들의 영향이 컸다. 숙소 안에서 그냥 수다 떠는 것만으로 그 여행의 가치가 충분한 것처럼 여겨졌다. 하물며 새로운 풍경을 함께 보며 느낀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좋은 것을 보며 같이 흥분하고 놀라고 서로 이야기하며 사진 찍는 일,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캄보디아 여행이 코로나19 직전인 2019년 겨울이었으니 벌써 6년이 흘렀다. 하지만 평생 중 며칠의 추억이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을 가기도 한다. 친한 사람과 여행 갔다 오면 관계가 틀어질 수 있다는 말도 있지만, 만일 여행 후에도 계속 기억되고 또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친구와는 평생을 함께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