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과 명단의 미학

2006년 6월 소아과

by 외과의사 이준서

재활의학과가 끝나고 소아과가 시작됐다. 이제는 일했던 병동을 떠나서 새로운 곳으로 옮기는 게 제법 익숙해졌다. 인계하고 나올 때 친해졌던 병동 간호사들과 인사하고 나오는 여유도 생겼다.


소아과 인계를 받았는데, 인계를 해주는 전턴의 얼굴에서 뭐랄까 재활의학과 인계를 해줬던 인턴의 슬픈 표정과 응급의학과 인계를 해줬던 인턴의 희열 중간쯤의 묘한 표정을 엿볼 수 있었다. 인계하면서 "명단이 아주 정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회진돌때 아이들과 엄마들을 잘 잡아와야" 한다는 것 두 가지를 여러 번 강조했다. '명단'이라는 건 재원환자들의 리스트인데, 좀 바쁜 과들은 전공의나 펠로선생님들이 전산에서 직접 출력해서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과들은 명단을 만드는 것이 인턴잡 (인턴의 업무)로 되어있다.


호흡기내과에서는 근무시작전 ABGA를 했었고, 응급실에서는 근무시작전 넘겨받을 환자 인계를 받았었는데, 소아과에서는 7시까지 명단만 완성해두면 되는 시스템이다. 처음 일주일은 명단 초안이 나오면 6시반쯤 1년차에게 먼저 보여주고 컨펌받으라고 인계를 받았다. 뭐 지금까지 명단은 많이 만들어봤으니 한 30분 정도면 되겠지? 그럼 6시쯤 시작하면 되니, 여유롭게 5시반쯤 일어나서 씻고 커피마시면서 슬슬 명단을 치면 되겠군. 이 따위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6시 좀 안되는 시간에 명단 작업을 시작했다. 과에 따라서 MS 워드나 한글, 엑셀, access 등의 프로그램을 쓰는데, 여기는 엑셀을 사용하고 있었고 몇번 써봤던 터라 어렵지 않았다.


명단을 칠때는 환자 (소아과의 경우 아이들이니 환아) 의 정보를 전산에서 확인하고, 병실호수, 이름, 성별, 나이, 재원일수, 진단명, 추가 사항 (보통 전공의가 추가 지시를 주는데, 투약중인 항생제나 계획중인 시술이나 수술) 을 입력한다. 오늘 재원환자를 보니 17명이었고, 주로 감기, 모세기관지염, 급성위장염 등의 경증 환자가 대부분이었다. (소아중환자실은 회진을 따로 돌아서, 다른 인턴이 명단을 담당했다) 진단도 몇 개 안되고 재원환아도 몇명 없어서, 10분만에 초안을 완성할 수 있었다. 6시반까지 기다렸다가 1년차에게 전화할지, 바로 전화할지 잠깐 생각했는데 귀찮아서 그냥 바로 전화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A를 받기엔 글렀다) 소아과 1년차 선생님은 응급실에 있으니 내려오라고 했다.


초안을 한장 뽑아서 응급실에 내려갔다. 1년차 선생님은 나이가 좀 있어보이는 여자선생님이었는데, 지난달에 봤던 재활 1년차 선생님과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응급실 소아과구역은 빽빽대면서 울고 있는 아이들과 지친 엄마들로 꽉 차 있었고, 소아과 선생님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가 서려있었다. 명단을 보여주니, 한 2초 정도 훑어보더니, '진단명 시작은 다 대문자로 해야 돼. 그것만 고치고 20장 출력해.' 짧게 지시를 줬다.


내가 가져간 초안은

r/o bronchiolitis (모세기관지염 의증, 모세기관지염이 의심되지만 아직 확진은 아니라는 것)

이렇게 되어있었고, 1년차 선생님의 수정사항을 반영해서

r/o Bronchiolitis

이렇게 고쳤다.


고치고나서 소아과 의국에서 20장을 출력하고 나니 대략 6시반 정도였다. 나는 6월 인턴이 된, 능숙한 내 모습에 감탄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가? 이제는 나도 30분 일찍 명단을 출력할 수 있게 됐구나. 정신차려보면 수술실에서 집도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4년차 선생님이 의국에 와서 명단을 한장 집었다. 잠깐 명단을 훑어보더니, 나에게 한마디하고 휙 나갔다.


"인턴선생님, r/o 도 대문자로 바꿔야돼요. 바꾸고 다시 출력하세요."


현재 버전은

r/o Bronchiolitis 인데,

4년차 선생님의 수정사항으로 인해

R/O Bronchiolitis 로 바뀌었다.


원래 버전으로 출력된 20장의 깨끗한 A4 용지를 버리고, 4년차가 바꿔준 새 명단을 뽑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냥 r/o 으로 출력된 명단을 가지고 회진을 돌면 안되나??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아니면 나의 문제인가? 내가 의대교육 6년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받았으면 r/o 이라고 입력하는 실수를 애초에 안할 수 있었을까?


프린터에 종이가 걸려서 잡아빼고 어쩌고 하면서 새로 출력을 다 하고 나니, 대략 7시 2분 전이었다. 그래도 2분 여유가 있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펠로선생님이 들어와서 명단을 훑어봤다. 그리고 한마디 했다.


"인턴선생님, R/O 과 진단명 사이에 빈칸은 두칸이 아니고 한칸 이에요. 다시 출력해야돼요. 시간없으니 빨리 하세요."


R/O Bronchiolitis

펠로선생님의 날카로운 눈매 덕분에

R/O Bronchiolitis

로 최종수정.


A병원 소아과가 창설된 이래로 최악의 인턴이 나 일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최대한 빠르게 출력을 했는데, 7시 3분에 출력이 완성됐다. 그 결과 컨퍼런스 시작시간인 7시에 맞춰서 온 1년차부터 펠로, 교수님들까지 프린터에서 갓 출력된 따끈한 명단을 받아볼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명단을 출력하고 회진을 돌고, 하루 일과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루를 지내보니 그렇게 바쁜 곳은 아닌데, 정신 바짝차리지 않으면 한달 내내 말도 안되는 일을 실컷 하게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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