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재활의학과
오늘은 회진끝나고 교수님들과 펠로 선생님들이 일찍 올라가는 바람에, 1년차 선생님과 둘이 커피를 한잔 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선생님에게 재활의학과 1년차로서의 업무 만족도가 어떤지 물어봤는데,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선생님도 아직 1년차 5월이니, 아직 재활의학과에서 근무한지 두달 밖에 안됐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자잘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선생님이 가장 힘들다고 느낀 점은 '환자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점이라고 했다.
의학은 굉장히 여러 개의 과로 나누어져 있고, 모든 과가 가지는 핵심 기능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아직 재활의학과의 기능이 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실제로 회진돌때 옆에서 교수님이나 펠로 선생님이 1년차에게 주는 오더를 옆에서 듣고 있으면, 90% 이상이 타과 컨설트에 대한 얘기였다. 호흡기내과에서 회진돌때 직접적인 치료에 대한 오더가 대부분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면서 1년차 선생님은, '나는 각도기 들고 다니면서 환자의 구축 (contracture, 사지의 움직임이 떨어지면서 관절이 굳는 현상) 각도 재는게 다 예요' 라고 했다.
깨끗한 얼굴로 이렇게 얘기하시는 걸 듣고 있는데,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나는 내심 재활의학과 1년차의 만족도는 최고일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었다. 잠도 충분히 잘 것 같고, 환자들도 턴오버가 빠르지 않고, 밤 사이 안좋은 환자가 중환자실에 입원할 일도 없고... 1년차 전공의 입장에서 더 이상 뭘 바랄게 있다는 거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의사가 되겠다고 병원에 들어온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가 평생 하겠다고 들어간 과의 일이 잘 안 맞는다고 느끼면 그것도 참 딱한 일이겠다고 생각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하루종일 끼니도 제대로 못챙겨서 병동에 굴러다니는 간식들을 줏어먹더라도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보람을 느끼면서 사는 게 더 보람있는 삶일까? 편한 게 좋은 것인지, 중요한 치료를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게 좋은 것인지... 상호 배타적인 두 가지가 아닐텐데, 적어도 수련 초기에는 둘 다 가질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 드는 생각은, 이런 1년차의 장단점은 펠로가 되고 교수가 되면서 어떻게 바뀔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재활의학과 교수님이 호흡기내과 교수님보다 더 힘들어질 것 같지는 않다. 1년차 때는 일의 강도를 떠나서 어차피 병원에서 살아야하니까, 어떻게보면 두 과 간의 갭은 레벨이 올라갈수록 더 커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재활 교수님은 밤중에 환자가 나빠져서 병원에 급히 나오거나, 병동에서 급한 CPR 환자가 생기는 경우가 잘 없겠지. 반면 호흡기내과 교수님은 (적어도 주니어 시절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1년차 선생님도 이렇게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단점도 한 가지 있다. 호흡기내과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인턴 찌끄레기에 불과한 나도, 업무의 90% 이상이 환자 진료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욕창 드레싱을 한다든지, 동맥혈 가스검사 채혈, 혹은 포텍스 드레싱 등... 그런데 재활의학과 인턴의 업무는 (업무의 양 자체는 상당히 적지만) 별로 의학적이지 않은 업무가 많다. 오늘의 중요한 업무는 맨날 똑같은 환자들이 있는 명단 파일을 펠로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서 자세히 업데이트하는 것, 그리고 저녁에 있었던 컨퍼런스 PPT를 미리 취합해서 일괄적으로 자동 슬라이드넘기기 기능? 을 해제하는 것이었다. 명단 업데이트에 대해서는 펠로 선생님에게 길게 설명을 들었고, PPT 수정에 대해서는 3년차 선생님에게 길게 설명을 들었는데, 사실 둘다 30분도 안 걸려서 끝났다. 시간을 재보진 않았는데, 아마 둘 다 펠로 선생님과 3년차 선생님이 직접했으면 설명하는 시간의 반 정도면 끝냈을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인턴의 업무를 일부러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1년차 선생님에게 들은 얘기와 내가 느꼈던 점을 돌아보면서 드는 생각은... 고년차 선생님들, 펠로 선생님, 그리고 교수님들은 이것과 많이 다를까? 아니면 원래 재활의학과는 대학병원에서는 별로 할일이 없고, 개원하면 할일이 엄청 많아지는 과일까? 메이저과는 대학에서 바쁘고 개원하면 파리 날리고, 마이너는 거꾸로 라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뭐 나는 어차피 성적도 안되고, 막연히 수술하는 과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재활의학과에 지원할 일은 없다. 하지만 호흡기내과와 응급실의 경우 내가 근무해보기 전에 생각했던 각 과의 모습과 실제 느꼈던 과의 모습이 거의 일치했었기 때문에, 재활의학과에서 느끼는 괴리가 더욱 생소하다.
재활의학과는 들어가기 쉬운 과도 아니고 다른 과에 비해서 편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만약 4월 이전에 누가 나에게 재활의학과 들어갈 기회를 준다면 덥썩 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근무를 실제 해보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 지금까지 돌았던 3개 과들 중에 '나랑 잘 맞는다'고 느낀 과는 없었던 것 같다. 내과와 응급실에서 고생할때는 아무 생각 없었는데, 시간이 많아지니 확실히 생각도 많아지고, 걱정이 생기는구나. 어쩌면 이것도 하나의 단점일지 모르겠다.
응급실에서는 환자가 내원할때의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고 생각했는데, 이번달에는 각 진료과에 대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