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5월 재활의학과
드디어 고대하던 5월이다! 내과와 응급의학과에서 개고생하다가 재활의학과를 오니까 너무 행복하다. 나에게 마지막 인계를 하고 정형외과로 떠나던 전달 인턴의 슬픈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 응급실 인계를 하고 히죽히죽 웃으며 일어나던 인턴의 표정과 너무 대조적이었다.
오늘 첫날 근무를 했는데, 무려 7시반에 재활의학과 의국으로 출근했다. 5시에 일어나서 ABGA를 할 필요도 없었고, 출근길에 떨리는 마음으로 환자베드가 복도까지 밀려나와있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 7시반 출근이면 숙소에서 7시 15분에 일어나도 늦지않게 갈 수 있지만, 습관이 돼서 그런지 5시반에 눈이 떠졌다. 재활의학과 인턴인계장을 대강 넘겨보다가, 6시반에 직원식당에서 한가롭게 아침식사를 했다. 식사를 다하고 커피까지 마셨는데 7시반까지 시간이 너무 남아서 숙소에 가만히 앉아서 사색에 잠겼다. 그사이 CPR 방송이 한번 나왔는데, 내과와 외과 인턴들이 우르르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시간이 남는데 뛰어갈까? 잠깐 생각하다가 괜히 잡혀서 못나올까봐 그만두었다.
7시 25분에 재활의학과 의국에 가니, 1년차 선생님이 먼저 와 있었다. 학교다닐때 몇번 봤던, 두 학번 위 여자선배였다. (영어를 잘하시는 분이고, 특례입학 하신 분인거 같다) 선생님과 겹치는 동아리나 단체가 하나도 없었는데, 나를 기억해주셨다. 사실 대부분 학교선배들은 나와 겹치는 게 없었어도 바로 반말을 하는데, (야! 인턴 이리 와봐) 이 선생님은 아는 척을 해주신 뒤에도 계속 존대말을 쓰셨다. 감사한 마음도 좀 들었지만 약간 벽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재활 1년차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과와 응급실을 돌면서 만났던 수많은 다른 과 1년차들과는 많이 달랐다. 가장 극적인 차이는, 가까이 앉아있어도 아무런 냄새가 안났다. 사실 사람에게 냄새가 안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인턴 들어오기전까지는 오히려 냄새가 나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렇게 26년을 살다가 인턴 들어와서 2달을 지나고 나니... 1년차라는 사람에게 냄새가 안나니까 너무 이상했다. 심지어, 머리를 감은 뒤 말린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통 1년차들의 머리는 떡졌다가 회진 직전에 대충 물을 발라서 가라앉히는 과정을 3번내지 4번정도 반복한 스타일이다. 여자선생님들은 그래도 머리는 감는 것 같은데, 과를 불문하고 내가 봤던 모든 여자 1년차들은 8am 이전에는 항상 감은 뒤 다 안말라서 불은 미역같은 머리를 휘날리고 다녔다. 하지만 재활 1년차 선생님은!! 머리가 샴푸 광고를 찍는 것처럼 아주 윤기가 흐르고 깨끗해보였다.
1년차 선생님의 깨끗한 머리를 넋놓고 바라보고있는데, 교수님들과 펠로 선생님, 그리고 전공의 윗년차 선생님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컨퍼런스가 시작되고, 나는 구석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조용히 앉아있었다. 컨퍼런스 분위기도 상당히 생소했다. 호흡기내과나 응급의학과의 경우, 컨퍼런스를 하다보면 어느정도 의견대립이나 훈계가 항상 있었다. (이 환자는 왜 ICU를 안가고 일반병동으로 온거야? 저 환자는 오늘 ABGA 처방을 안했니? 이 환자 아직도 신경과 콜 안했어? 등등... ) 그런데 재활의학과는 아무런 의견대립이 없었고, 1년차를 향한 질책이나 비난이 없었다. 심지어 컨퍼런스중에 잠깐씩 스몰토크를 하기도 했는데, 1년차 선생님이 한번 환하게 웃기도 했다! 소리내서 웃은 건 아니고 밝게 (그것도 잠깐) 미소를 지은 것 뿐인데, 냄새도 안나고 머리도 윤기나는 선생님이 웃으니까 너무 보기 좋았다. 내가 무슨 서울역에서 노숙하면서 지내는 것도 아니고... 인턴 두번 하지는 말아야겠다.
암튼 회진을 돌았고 환자도 11명 밖에 없는데다가 재원일수가 10일 넘어가는 환자가 대부분이라서 별로 오래 안걸렸다. (한명은 재원일수가 무려 121일이었다) 회진돌면서 1년차선생님에게 몇가지 오더가 주어졌는데, 오더의 90%가 다른과 컨설트였다. (이 환자는 심장내과 보자. 이 환자는 정형외과 보자. 이환자는... ) 회진 후 넘버 2 교수님이 카페에서 커피를 사주셨다.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교수님이었는데, 짙은 보라색의 단색 셔츠에 까만색 넥타이를 매신 아주 멋진 분이었다. 호흡기내과 교수님들은 다 좀 병원생활에 찌든 상태인 것처럼 보였는데, 이 교수님은 뭐랄까... 좀 생기있어 보였다. 아침식사 후 커피를 한잔 마신 상태였지만, 왠지 재활의학과에서 처음 교수님이 사주시는 커피는 꼭 마셔야 할것 같아서 한잔 더 마셨다. 왠지 5월은 커피를 좀 많이 마시게 될것 같은 느낌이다.
회진돌고 병동콜을 기다렸지만 오후 회진돌때까지 콜이 2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호흡기내과에서 지겹도록 했던 포텍스 드레싱이라서 8초만에 끝냈고, 하나는 폴리 체인지라서 한 2분 걸렸다. 나머지 시간은 숙소에서 옷장 정리도 하고, 재활의학과 인계장을 몇 번 더 읽어봤다. 오후회진은 펠로선생님, 1년차선생님과 4시에 의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너무 심심해서 30분 일찍가서 의국 냉장고를 정리했다. 오후 회진전에 펠로선생님이 냉장고를 열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열어보진 않았다.
오늘은 인턴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평화로운 날이었다. 평생 재활의학과 인턴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