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 회복하는 여정, 내리막길 또는 오르막길
2020년 2월이 지나면서 코로나가 전 세계를 혼돈과 아픔에 빠뜨리기 시작했다. 재택근무체제로 바뀌고 외출이 삼가되고 서로와 서로 간에 격리가 요구되어 모두가 힘들었던 그때를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잊지 못한다. 수술이 잘 끝났고 걸음도 스스로 내딛을 수 있게 된 나였지만, 그 당시 나는 여전히 몸이 많이 약했었고 그래서 회사에서는 2020년 1월부터 내게 특별히 재택근무를 허락해 준 상황이었다. 그때의 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어렵고 외출 시에도 큰마음먹고 어렵게 발걸음을 내딛었었는데, 약한 내가 막 '적응'하려 해 본 새로운 삶의 모습이 세상의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착잡했다. 모두의 안전과 건강이 염려스러운 때였다.
한편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나는 투병때 혼자서 해왔던 질문에 대해 답을 찾게 되었다. 그때 왜 갑자기 병이 드러났을까, 왜 하필 2019년 가을에 급속도로 흉선종이 자라났을까, 그 당시 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삶의 현상과 이치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 또한 달라지겠지만, 나는 너무 고통스러웠음에도 아주 급격하게 병이 드러난 것에 도리어 감사하게 되었다. 코로나 시대에 모두가 철저히 격리하고 병원을 방문하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나는 이 병이 조금 일찍 드러나는 바람에 내가 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의사들과 긴급하게 소통하지 못하고 수술이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면 나는 숨이 막혀 더 버티지 못했을 수도 있고, 경계성종양은 흉선암이 되어 다른 장기로 침윤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잠깐이라도 혼자 있기에는 너무 위험했던 상황이었기에, 모든 가족들과 격리되어 병원에 혼자 있었다면 그 시간들을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싶었다. 내가 아플 때에 옆에서 자리를 지켜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더 감사했고, 그리고 코로나로 인해 고통받은 모든 분들, 코로나 시대 때 병마와 싸워야 했던 모든 분들을 위해 나도 모르게 기도하는 나날들이었다.
코로나가 심각하게 확산되기 직전이었던 2020년 2월, 예비 시아버지께서 미국에 일정이 있으셔서 짧게 방문하셨고 나 또한 인사드리게 되었다. 예비 시아버지께서는 투병했던 시간에 대해 격려와 위로를 전해주시면서, 곧 몸이 잘 회복되면 결혼식을 올리자고 말씀해 주셨다. 사실 나는 큰 병과 투병했던 상황이기에 결혼을 욕심내면 안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행여 혹시라도 흉선제거수술 이후 예후가 좋지 않다면 아픈 몸으로 짐이 될 수 없으니 약혼자와 헤어져야겠다고 스스로 다짐도 하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예비 시아버지로부터 기쁘게 나를 가족으로 맞이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으니 염려를 끼쳤음에 송구스러운 마음과 함께 감사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방사선 치료를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를 수술해 준 집도의와 중증근무력증 증상을 살펴봐주시는 신경과 의사도 나의 회복에 많은 축하를 건네주셨다. 다른 환자들보다 예후가 상당히 좋고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며 긍정적인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사실 그전의 나는 삶에 대해 스스로 강한 의지가 있다고 특별히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아픈 동안의 나는 어떻게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이 온몸을 채웠던 것을 기억한다. 신경과 의사는 흉선종이 재발하면 중증근무력증도 다시 심각해질 수 있기에 흉선종을 제거한 자리에 방사선 치료를 고려해 보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시키면 그게 무엇이든 잘 따라야 한다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흉부외과의 로봇전문 집도의는 방사선치료를 진행하지 않는 것에 한 표를 던지셨다. 우선 흉선종은 최선을 다해 제거되었고, 자신의 부족으로 정말 작은 흉선종이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젊은 환자인 나에게 스스로는 방사선치료를 권유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해 주셨다. 약혼자도 우선은 방사선치료를 받는 것이 현재로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것이 더 많은 과정일수 있기에 나의 회복 과정을 조금 더 지켜보자 했다. 방사선 치료가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는 상황에서 나는 하지 않겠다를 선택했고,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집도의와 약혼자에게 지금껏 감사하고 있다.
결혼을 하고, 꿈에도 가까워졌습니다.
나는 2020년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나의 약혼자는 남편이 되었다. 2019년 겨울부터 밀려버린 결혼식이었기에, 양가어른들께서는 한국에서 방문하시지 못하시는 상황임에도 우리가 2020년 가을 결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다. 2019년 이미 예식 장소와 드레스등 대부분의 결혼식 준비가 마쳐져 있었기에, 멈춰있던 모든 계약 건들을 진행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해 9월의 미국에서는 마침 코로나 확산이 잠잠해졌고 야외결혼식을 진행하게 되면 법적으로 100명의 하객까지 초대가 가능했기에, 제한된 수에 맞추어 우리는 조심스럽게 청첩장을 전했다. 크게 아픈 뒤였기에 고마운 분들께서 선뜻 축하를 하러 많이 참석해 주셨고, 나는 건강한 모습으로 고마운 분들과 밥 한 끼 하고 싶다는 소원을 그날 이루었다. 내 두 발로 걸어서 결혼식에 입장할 수 있었음에 감사했고, 하지만 그보다 함께 모시지 못한 양가어른들께 너무 죄송했다. 지금도 결혼식을 생각하면 기쁨과 아쉬움이 많이 교차된다. 오로지 자녀들의 앞날만 염려하고 축복해 주신 양가부모님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그리고 나는 2019년 2월에 치렀던 시험 결과가 합격 점수로 인정받아 미국 캘리포니아주 변호사가 되었다. 결혼식을 치른후 나는 변호사시험에 다시 한번 더 도전하려 시험을 준비하던 때 이 기쁜 소식을 들었다. 아직은 좀 더 휴식을 취하고 몸에 무리를 더하지 말라는 하늘의 선물이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 직업으로 일을 해나가기 전에 내가 깨달아야 할 것들이 분명 있었던 듯하다. 아프면서 느낀 많은 깨달음들은 나로 하여금 내 직업을 더 사랑하고, 내 직업으로 하는 일 하나하나에 더 인내하고, 또 내가 내 직업을 선택할 때 돕고 싶었던 특정 계층을 향한 초심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해 주었다.
이쯤에서 나의 이야기가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끝이 났다면 모든 것이 해피앤딩이었겠지만, 계속해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모두는 또 나름의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걸어가고 있다. 결혼식도 올리고 원하는 직업도 가지게 되었지만 당시 내 건강은 생각보다 쉽게 차오르지 않았다. 흉선종을 제거하고 중증근무력증도 깨끗이 사라지면 가장 완벽한 시나리오였을 텐데, 병원에서는 내게 남아있는 중증근무력증을 컨트롤하고자 계속 약을 처방했다. 나는 모범생과 같은 마음으로 꼬박꼬박 약을 복용했지만, 병의 차도는 없었고 거기다 내 몸에 들어온 독한 약들의 부작용과 싸워야 했다. 정말 감사하게도 흉선종제거수술 이후 숨쉬기, 먹기, 걷기등이 가능해졌고 겉으로 보았을 때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 듯하였지만, 큰 병을 앓은 많은 이들이 겪는 바와 같이 안타깝게도 나의 일상생활은 100퍼센트 회복되지 못했다.
2020년부터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난치병이라는 중증근무력증을 이기기 위해 나의 일상생활은 많이 바뀌었고, 나의 병을 치료하고자 남편이 참 많은 노력을 해주었다. '다시, 숨 쉬고 걷는 기적'을 매듭짓기 전에, 다음화에서는 수술 그 후의 5년의 시간을 이야기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