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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35살에, 다시 걸음마

휠체어와 보행기 (Walker)와 지팡이를 지나

by Joyce 노현정

아프기 전의 나는 늘 그리 불편하지 않는 적당한 높이의 구두를 신고 다녔다. 학교에서,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구두를 신으면 나를 조금 더 단정해 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각또각 구두에서 적당한 소리가 나는 것도 내 삶에 조금의 절도를 더하는 듯하여 좋았다. 구두를 신고 나는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들을 빠짐없이 잘하고 싶어서 항상 걷지 않고 뛰어다녔다. 걷는 것은 내게 너무도 당연한 행위었고 걷는 속도만으로는 늘 부족하다 싶었기에, 나는 숨 가쁘게 뛰어다녔다. 부끄럽게도, 그때는 걷는 것이 주는 행위의 기쁨을 깊숙이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 같다.


호흡곤란이 참으로 고통스러웠지만 내 삶에 대해 많은 감사를 느끼게 한 특수한 경험이었던 만큼, 갑작스럽게 다리에 힘이 빠져 걷지 못했던 시간 또한 나에게 잊을 수 없는 깨달음을 선사했다.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여주는 내 몸에, 내가 원할 때 내 몸을 이동할 수 있도록 튼튼하게 지탱해 주는 내 두 다리와 발에 나는 너무 고맙다. 이제 나에게는 걷는 것의 행복과 의미가 너무도 크다. 한걸음 한걸음 발을 내디디면서, 생각을 다듬고 숨을 가다듬고 여유를 채워나갈 수 있는 ‘걷는 행위’가 너무 좋다. 요즈음의 나는 일 할 때의 특별한 상황들을 제외하고서는 편안한 운동화 그리고 납작한 단화를 일상에서 더 찾게 되었다. 매일매일 조금 더 부지런히 걸으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시간을 더 늘려가보려 노력 중이다.




천천히, 감사히 회복하는 시간

11월의 나는 상당히 허약한 모습으로 회복기간을 가졌지만, 12월을 맞이하면서 나는 많은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사실 11월에는 사지를 잘 못쓸 만큼 근육에 힘이 없어서 보는 이들이 눈물짓기도 했고, 근육경련과 기침 증상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한 달 사이, 너무 감사하게도 나는 얼굴에 생기를 찾아가고 있었다. 아직 호흡근의 힘이 다 돌아오지 않아 정상치를 회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선 어느 정도의 일상대화가 가능해졌다. 다시 노래를 자신 있게 부를 만큼 호흡근이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까 너무 궁금했지만, 이만큼 목소리가 나오는 것만도 참 감사할 일이었다. 음식의 경우 아직 큰 조각과 질긴 것, 맵고 자극적인 것은 먹을 수 없었지만 미음만 먹던 11월을 떠올리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 또한 상당히 다양하고 많아졌다.


아직 다리에 힘은 돌아오지 않았음에 나는 조비심도 많이 났었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 믿으며 그저 기다렸다. 수술 후 병원에서는 물리치료사가 매주 두세 번 우리 집을 찾아오도록 스케줄을 해두었다. 약해진 내가 다시 근육에 힘을 키울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걸을 수 있도록 꼭 필요한 재활 운동들을 하나하나 친절히 알려주었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운동임에도 그때는 왜 그리도 힘들고 어려웠는지 - 그래도 물리치료사가 나에게 내어주는 숙제 아닌 숙제 같은 운동을 꼬박꼬박 따라 했다.


비록 걷지 못하고 제약도 많은 12월이었지만 나는 그때를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12월로 기억하고 있다. 살아났다는 그리고 회복 중이라는, 사람의 쉽게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강렬히 느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회복에만 오롯이 집중하면 되는 그때를 최대한 기쁘게 보내고 싶었다. 앞날에 대해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모든 고민은 내려놓고 나의 신체에만 온전히 집중했다. 그리고 나를 지켜준 분들에게 감사만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려고 노력했다. 나의 병간호를 마치고 곧 한국으로 돌아가실 엄마와도 참 오랜만에 따뜻한 일상을 누렸다. 미국에 살면서 크리스마스를 누리고자 집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보는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던듯하다.


수술을 잘 마치면 나를 꼭 보러 오겠다고 약속하신 아빠가 12월 말 약속을 지키러 한국에서 오셨다. 이번에도 시간은 단 일주일이었지만 병원침대에서 아빠를 맞아야 했던 10월과는 너무도 바뀐 상황, 다른 마음이었다. 엄마와 여동생만 공항에 아빠를 마중 나갈 계획이었지만, 많이 나아지고 있음을 빨리 보여드리고 싶었던 나는 약혼자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공항으로 함께 향해 아빠를 깜짝 놀라게 해 드렸다. 아빠께는 시차도 적응하시기 쉽지 않은 일주일이었겠지만, 부모님과 나 여동생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기쁜 일로 모였다며 즐거워했다. 멀리 유럽에서 일을 하느라 함께 오지 못한 막내 남동생이 많이 그리웠지만, 마침 크리스마스가 결혼기념일이신 부모님께 몇 년 만에 함께 축복해 드릴 수 있어 감사했다. 아직 온전하지 못한 나 때문에 멀리 외출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나와 여동생이 살아온 곳, 공부한 곳, 일한 곳 등을 보여드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한 시간들이었다.


다시 걸을수 있기를

나의 다리는 차츰차츰 힘이 차오르는 것 같다가 또 부족해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발한자국을 띄어보았는데 딱 한걸음이 걸어졌고 나와 우리 가족은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내딛을 수 있는 발자국은 아주 천천히, 하지만 조금씩 늘어났다. 넘어지기도, 미끄러지기도 했고, 힘이 없는 다리 때문에 잘못된 걸음걸이를 만들어가고 있다며 물리치료사 선생님께 주의도 많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거실에서 나는 예상치 못하던 순간 대여섯 걸음을 걷게 되었다. 더 걷지는 못하고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지만 아빠 엄마는 박수를 치며 좋아하셨다. 새해가 밝으면 35살이 되는 내가 마치 어린 아기와 같이 아장아장 걸음마를 다시 하는 상황에, 나는 내가 새 삶을 얻은 것과 다름없다 싶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응원해 주는 부모님을 보면서 나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마음이 울렁거렸다. 이렇게 아파서 죄송했고, 하지만 이렇게 다시 일어설 수 있음에 너무 감사했다. 12월 30일까지 함께 하신 후 비행기에 오르신 부모님은 비행기에서 2020년 1월 1일을 맞이하시며 한국으로 돌아가셨다. 엄마는 그렇게 3개월 가까이 꼬박 나를 간호하신후 떠나셨다.


2020년 새해가 밝았고, 나는 물리치료사와 함께 운동을 하며 걷기 연습을 계속 이어갔다. 부모님이 계실 때만 해도 나는 휠체어에 많이 의지했었는데 이제는 워커(Walker)와 지팡이를 이용해 걷는 것도 많이 연습했다. 하루빨리 온전히 나의 두 다리로만 걷고 싶어 무리가 되지 않는 양의 운동을 계속해나갔다. 엄마가 안 계시는 자리를 여동생과 약혼자가 많은 도움으로 채워 주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이 차츰차츰 늘어났다. 조금 춥거나, 몸이 떨리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리의 근육이 굳는 듯 걷지 못하는 때도 있었기에 나는 안정적인 마음으로 회복에 임하려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1월 중순- 나는 워커도 지팡이도 없이 약혼자 앞에서 내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9월 13일 이후 4개월 만이었다.


[아직은 약한 다리의 힘 때문에 엉거주춤하지만, 그래도 혼자 걸을 수 있다며 기뻐했던 그때 그 감사한 순간의 사진을 이 글과 함께 올려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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