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였다면 그 시간들을 나는, 과연
수술을 마치기까지 두달 남짓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나는 응급실에 5번 방문했고 4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급격히 나빠진 건강 때문에 회사의 출근도 결혼도 미루어야 했던 만큼, 주변의 감사한 지인 및 친구들은 내가 투병 중인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받기가 어려웠기에 약혼자와 여동생을 통해 나의 병문안을 물어봐주셨는데, 우리는 감사하고 죄송하게도 병문안을 자제해 달라 부탁드릴 수밖에 없었다. 우선 급변하는 병의 태세로 상황이 긴급했다 보니 찾아와주시는 분들을 뵙기가 쉽지 않았다. 걷지 못해 휠체어에 의지하고, 근육발작이 오고, 숨이 넘어가는 내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도 많이 조심스러웠다. 어떻게든 이 병을 이겨내어 정상적인 모습으로 다시 만나고 싶었기에, 치료 후 꼭 먼저 인사를 드리겠다며 그 마음만을 전했다.
친인척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일절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었지만 나는 전화와 메시지, SNS으로 전달 주시는 많은 분들의 응원이 너무 감사했고 분명 그 따뜻한 마음은 내게 병을 이겨내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 한 분 한 분의 마음들을 여전히 다 기억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간에 마음이 전해지는 것, 아끼는 사람에게 응원과 진심을 전하는 것, 간절함이 모아지는 것.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아끼는 것은 우리 삶에서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싶다. 너무 아팠지만, 나는 나를 기억해 주고 아껴주는 많은 분들의 마음을 오롯이 느낀 시간에 또 한 번 더 감사를 고백한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해 11월 둘째 주 퇴원 후 돌아온 집이 그렇게나 반갑고 편안할 수 없었다. 팔과 몸에 달려있던 각종 줄들을 모두 제거한 것만으로도 몸은 너무 자유로워졌고, 집이라는 공간이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비록 여전히 걸을 수 없었고 죽만 겨우 삼킬 만큼 몸은 너무도 약한 상태였지만, 우선 흉선종 제거 수술은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은 상상해 왔던 것보다도 더 벅차올랐다. 퇴원한 후 다음날,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할 사람이 없는데 싶어 누굴까 엄마가 확인해 보시니 회사의 고마우신 분들께서 쾌유를 비는 메시지와 함께 화사한 꽃바구니를 보내오셨다. 중학생 어린 사촌동생도 손수 골랐다는 예쁜 꽃들과 함께 빨리 낫기를 응원하는 메시지의 풍선을 들고 왔는데 그 마음이 너무 따뜻했다.
아픈 동안 내 주변에 내 옆을 지켜주는 가족들, 감사한 분들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상상을 종종 해본다. 아플 때는 그 고통이 너무 크다 보니 나는 병마와 싸우기에 온 힘을 다했고 그것만으로도 하루하루를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하루아침 갑자기 병이 드러나 그렇게 아파하는 나를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나는 헤아리기가 어렵다. 특히 나처럼 24시간 보호자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바쁜 삶을 유지하면서 환자를 간호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임을, 나를 돌봐주시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픈 환자를 돌보는 세상의 많은 부모님, 자녀, 배우자, 보호자들의 무거운 마음과 고단함을 위해 나도 모르게 기도하는 마음이 차올랐다.
한국에서 나의 소식을 계속 듣고 계시는 아빠는, 내가 수술하기 전날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깨끗한 옷을 차려입으시고 꿈에 찾아오셨다고 했다. 할머니께서 우리 가족에게 힘을 전하러 아빠 꿈에 다녀가셨구나, 생전의 할머니의 사랑이 다시금 느껴졌다. 나는 오랜 미국생활 때문에 자주 뵙지 못하는 친척분들이 한국에 많이 계신다. 투병하는 나를 위해 많은 친척어른들과 사촌들이 격려와 위로의 인사를 전해왔다. 나의 삶의 터전이 바뀌면서 얼굴을 뵙지 못한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나를 기억해 주고 나의 건강을 빌어주는 친척들이 너무 감사하고 그리웠다. 아프고 힘들수록 끈끈한 가족애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절절히 느낀 나는 지금도 그때 친척분들로부터의 응원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퇴원한 후 약 일주일이 지났을 때, 원래 결혼식을 하기로 예정된 날이 다가왔다. 비록 결혼은 예정 없이 무기한으로 밀려버렸지만, 약혼자는 결혼을 약속했던 날 저녁을 같이 먹고 싶다 했다. 따뜻하게 옷을 겹겹이 입고 엄마와 여동생의 배웅을 받으며 조심스럽게 집을 나서본 그날 - 나는 약혼자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참 오랜만에 바깥 외출을 나왔다. 약혼자와 마주 앉아 아주 천천히 저녁을 한입 한입 먹으면서,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일상의 한 부분을 딛고 일어선듯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올랐다. 예비 시어머니께서는 손으로 써주신 위로의 편지를 약혼자를 통해 보내오셨다. 결혼식에 뵐 줄 알았던 예비 시어머니로부터 아팠던 시간에 대한 위로와 사랑이 담긴 편지를 읽으니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뒤섞여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어느새 12월
시간이 흘러 12월이 훌쩍 다가왔다. 모두가 캐럴송을 들으며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때였다. 내가 일하던 회사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전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수고의 인사를 전하는 큰 연말파티를 가져왔다. 그해의 나는 당연히 행사에 참석할 수 없음에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에게 직원분들이 나의 쾌유를 빌어주는 응원의 크리스마스를 일찍이 보내와주셨다. 카드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분 한 분의 염려와 응원 가득한 목소리가 온전히 느껴졌고 나의 일터가 너무 그리웠다. 미국과 한국에서 응원을 보내주는 친구들, 그리고 먼 길을 달려와 집으로 병문안 와준 친구들에게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앞으로 그 고마움에 꼭 보답하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나의 회복과 쾌유를 빌어주신 분들은 나의 가족, 친척, 친구, 동료에 끝나지 않았다. 신앙심 깊으신 외삼촌 가족들께서 섬기시는 교회에서는 나의 건강을 위해 투병이 시작된 9월부터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여동생이 발걸음 하고 있던 교회에서도 모든 성도님들께 나의 건강을 위해 긴 시간 중보기도 해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을 만나본적도 없으셨던 수많은 분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셨다니- 중보기도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는 나의 생명과 앞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신 수많은 분들께 그저 감사하다고 되뇌고 되뇌었다.
수술 후 처음으로 만난 암전문의와의 외래에서 나의 흉선종은 2기 (stage 2)로 판명된 것을 알게 되었다. 흉선을 싸고 있는 피막이 있는데, 흉선종이 이 피막을 아주 미세하게 살짝 벗어 나온 상태였기 때문에 2기라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1mm의 틈을 남겨두고 옆의 장기를 침범하지 않은 것은 그 의미가 컸다. 침윤이 발견되었다면 흉선암으로 다루어져야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장기침윤이 없었기에, 장기로 퍼져나가 생명을 위독하게 하는 흉선암과 양성종양 사이의 경계성종양으로 보인다고 했다. 암전문의는 방사선 치료를 권유했었는데, 그때의 나는 방사선 치료의 의미를 잘 몰랐다. 우선은 약해진 몸부터 더 회복해야 했기에 몸을 추스르는데 집중했다. 수술 후 한 달 동안 나는 아주 천천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종류도 늘어났고 몸의 근력도 조금씩 회복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