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잘 깨어나기를
흉선종 제거 수술을 안전하게 잘 받을 수 있도록, 10월의 나는 몸 안의 자가항체를 줄이고자 필요한 치료들을 열심히 받았고 11월 초로 예정된 수술날짜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내 몸이지만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컨트롤이 되지 않는 모든 상황이 나는 여전히 낯설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상태로 6개월 또는 1년을 버티며 수술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너무나 큰 위안이었고, 수술 후의 빠른 경과 또한 소망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오래전 일이지만 유독 머릿속에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나날들이 있다. 각인된 이유는 희로애락이 닮긴 우리의 삶처럼 기쁜 일 좋은 일, 또는 너무 큰 슬픔이나 아픔 등 다양할 것이다. 수술했던 그날이 나에게는 그렇게 생생하다. 수술을 준비했던 때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내가 다시 그 시간을 고스란히 겪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신체적인 고통만큼이나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는 힘들었다. 그 끝이 해피앤딩일지 결과를 알수있다면 어려운 시간을 임할 때 조금은 덜 힘들었을까 어린 생각도 해본다 - 그때의 나는 수술 후의 불투명함 때문에 스스로 용기를 내려 힘껏 애썼던 듯하다. 지금 돌아보면, 비록 우리의 삶은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내 삶을 담담하게 마주 할 때 생각지 못한 '기적 같은 평안‘에 다다를 수 있음을 배운 시간이었다. 삶의 ‘불확실성'은 분명 ’예상치 못한 선물 같은 일‘ 또한 허락하고 있기에, 두려움은 조금 내려두고 대신 조금 더 담담히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수술당일날
2019년 11월 6일 오후 3시로 스케줄 된 수술을 하기 위해서, 그날 오후 1시까지 수술대기실로 와달라는 병원의 요청에 따라 우리 집은 아침부터 괜히 분주했다. 수술후 일주일 정도의 입원을 예상하며 필요한 것들을 가득 챙겼다. 중증근무력증을 만나면서 음식을 잘 삼키지 못하는 증세 때문에, 내가 먹고 있던 음식을 남이 보았을 땐 흡사 아기 이유식과 같다고 했을 것 같다. 여전히 한 숟가락 음식을 뜨기가 힘들었지만 엄마는 내가 수술 전 조금이라도 더 음식을 먹을 수 있기를 바라시며 목 삼킴에 어렵지 않도록 갖가지 반찬과 소고기를 아주 잘게 잘라놓아 주셨다.
몸도 마음도 많이 떨렸었다. 계속 진행되는 온몸의 근육발작과 멈추지 않는 기침, 온몸의 힘 빠짐으로 나는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동시에, 혹시라도 내가 수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 수술하여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나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내 머릿속을 차지하려는 부정적인 시나리오와 싸우며 그 마음들을 누르고 또 눌렀다. 한국에서 양성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20대 중반에 한적 있었는데, 그때 개복수술을 정말 씩씩하게 겁도 없이 임했다가 수술 후 너무 아팠던 기억이 계속 되살아났다. 이번에도 개복수술 때만큼 아프겠구나라고 두려워하면서도, 로봇수술 덕분에 가슴중앙을 절개하여 갈비뼈를 자르는 수술이 아닌 것만으로도 나는 그저 감사하다고 되내었다.
약속된 시간에 병원에 당도하여 초록색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수술준비를 마치고 보니 태연한 척하려고 해도 나는 상당히 떨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찍어놓은 사진들을 보면 나는 입을 앙다물고 미소를 짓고 있는데, 내 옆에 함께했던 엄마, 이모, 여동생, 약혼자모두 아마 느끼셨을 거라 생각된다, 나는 열심히 씩씩한 척하고 있었던 듯 하다. 흉선종양은 수술을 통해 잘 제거 되겠지만, 수술 후 잘 깨어나고 또한 무엇보다 중증근무력증을 이겨내어 근육에 힘이 다시 돌아올지 여부가 모두의 큰 바람이었다 보니 우리 모두는 눈빛으로 서로서로를 격려하고 또 의지했다.
간절한 마음
유난히 더디게 흘러가는 수술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분들께서 수술대기실로 들어오셨다. 내가 아프기 전, 신앙이 없었던 여동생이 크리스천이 되었었는데, 여동생이 발걸음을 하고 있던 교회의 목사님들께서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러 오신 것이었다. 기독교에 대해 전혀 몰랐던 나는 목사님들의 기도 방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의 나와 달리 내가 수술을 앞두고 정말 많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목사님들을 뵈면서 깨달았다. 엄마를 통해 나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 들으셨던 목사님들께서는 위험할 수 있는 모든 사안들을 하나하나 읊으시며 기도해 주셨다, 수술이 안전히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은 물론이고, 근육에 힘이 없는 내가 수술 후 잘 깨어나기를, 행여라도 호흡곤란이 심해져서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수술 후의 통증이 너무 크지 않기를, 수술 후 1/2 확률을 이겨내고 내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말이다.
약속된 오후 3시가 가까워지자 이제 수술실로 향해야 했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는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는데, 수술실로 향하는 순간부터는 혼자라는 사실이 새삼 떨리고 낯설었다. 가족들 앞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으려고 참고 있던 눈물이 수술실을 향하는 침대 위에서 나도 모르게 볼을 타고 떨어졌다. 신앙이 없는 나였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기도했다, 제가 잘 깨어나게 해 주세요, 꼭 깨어나게 해 주세요, 저를 살려주세요.
생각보다 넓은 수술실에 들어가 친절한 의료진들의 안내 속에 긴장했던 내 마음이 녹아내린다 싶은 찰나, 이내 강력한 전신마취용 흡입마스크를 내 얼굴에 씌우자마자 나는 정말 5초도 세지못하고 빠르게 잠들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7시, 나는 수술에서 잘 깨어났다.
너무 감사하게도 아주 오랜만에 잠을 푹 잔 느낌이었다. 9월 혀가 뒤틀렸을 때부터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잠을 잘 들지 못했었으니, 전신마취덕에 나는 약 두 달여 만에 4시간 동안 잘 자고 일어났다. 어디를 통해 로봇수술이 행해졌는지 잘 모를 정도로 몸에 느껴지는 통증이 상상했던 것보다 미약했다. 살았구나. 내가 살았구나 싶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읊조리며 나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를 지었던 내가 기억난다. 깨어날수 있을지 모른다고 염려했던 상황을 우선 이겨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는 진심으로 기뻤고, 기도의 힘에 감사했다. 밖에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에게 얼른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이제 중환자실(ICU)로 옮겨진다고 했다.
훗날 이야기 하기를, 나의 약혼자는 그날 저녁 7시가 되는순간 왠지 내가 깨어났을것같다는 느낌을 강력하게 받았다고 했다. 간호사들은 내가 깨어난 것을 보고 가족들에게 얼른 전달하겠다며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