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도, 남편도, 나도—함께 자란 미국에서의 3년

‘행복했다’고 말하기보다, 분명 필요했던 시간

by 쏭맘

우리가 한국을 떠날 때의 마음가짐은 단순했다.
아이가 적응을 힘들어하면, 남편을 두고서라도 한국으로 돌아오자고.


돌이켜보면 우리는
‘변화를 싫어하는 내성적인 아이’라는 틀에
아이를 가둬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아이는 많은 일을 겪었다.


인종차별을 경험했고,
영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시안들은 귀머거리니?”라는 말을 한 선생님도 있었다.


대장 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늘 쫄병 역할만 하다가
스스로 새로운 친구들을 선택해 옮겨가기도 했고,


물을 무서워하던 아이는
꾸준한 노력 끝에 수영을 마스터했다.


아이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그래서 더 고맙다.
너무 잘 버텨준 아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마트 캐셔, 호텔 청소,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 같은 일을
검색해 볼 용기가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익숙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며
전공과 관련된 건축 일을 떠올릴 때마다
‘칼퇴가 안 되니까’라는 핑계만
계속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새로운 곳이었고,
그래서 부끄러움 없이 시작할 수 있었다.


적응은 힘들었고,
무기력함에 허덕이기도 했고,
불편한 사람들로 인해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럼에도 이 시간들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다듬어진 사람이 되었다.



남편 역시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타지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줄었고,
새롭고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이전보다 더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되었다.


가족이 함께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크고 낯선 땅에서
단 세 명이 서로를 의지하며
사랑하고, 도전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보내며

우리 가족은 분명 더 단단해졌다.


그래서 이 미국 생활을

‘행복했다’고 정리하기에는 조심스럽다.


다만 분명한 건,
이 시간 덕분에 우리 가족은
예전보다 서로를 조금 더 배려하게 되었고
새로운 것이 조금 덜 두려워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의 걱정과 달리
중간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끝까지 버텨냈다.


이제는
한국에서의 또 다른 시작을 위한

충분한 거름을 가지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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