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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쟁이 벌떡 일어나다.

밴댕이 vs구라쟁이, 첫 싸움의 결말

by 감차즈맘 서이윤

결혼한 지 겨우 한 달


대학원 졸업을 두 달여 앞둔 어느 날,

뭐가 그리 급해 그렇게 서둘러 결혼을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아주 사소한 일로

첫 부부싸움을 했다.


지금은 도무지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남편의 고집과 내 고집이 정면으로 부딪쳤던 것 같다.

그 하찮은 고집이 그때는 세상에서 제일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불씨가 되었고, 불씨는 삽시간에 번져 우리를 집어삼켰다.

결국 화해는커녕, 우리는 3일 동안 서로에게 말 한마디 붙이지 않았다.


한 공간에 살면서도 서로를 투명인간처럼 지나쳤고,

눈이 마주치면 차라리 더 어색했다.


그리고 그날, 우리 첫 싸움의 절정이 찾아왔다.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서로에게 날 선 말들이 오가던 중, 갑자기 남편이 '퍽'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숨을 헐떡이며 손을 허공에 뻗는 그의 모습은, 마치 내 손을 잡아달라는 신호 같았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손을 잡아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앞으로 내가 이 사람과 살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문제야.'


남편은 숨을 못 쉬겠다며 헐떡거렸고,

나는 주저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911을 눌렀다.


미국에서 911을 누른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들의 도착 속도였다.


아파트 단지 어딘가에서 삐뽀삐뽀 사이렌이 작게 울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소리는 가까워졌고,

불과 몇 분 만에 소방차가 도착했다.


쿵쾅거리며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고,

곧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문을 열자, 소방복을 입은 구급대원들이 들것과 장비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단호했고, 상황은 긴급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남편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몸이 움찔거리는 걸 나는 보았다.

바로 그때, 그의 연기가 내 눈앞에서 산산이 무너졌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두 팔을 휘저으며 외쳤다.


“I am okay now!”


내 눈은 휘둥그레졌고, 구급대원들의 눈빛은 순식간에 의심의 눈초리로 우리를 날카롭게 훑어보았다.


그들은 남편에게 “일어나 보라, 걸어 보라” 몇 가지 확인을 했다.

남편이 멀쩡히 움직이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마지막엔 단호한 목소리로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큰일 날 수 있다”는 엄포를 남기고는

장비를 챙겨 조용히 집을 떠났다.


현관문이 닫히자, 남편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눈을 피했다.

"미안해... 잘못했다고... 네가 화를 안 푸니까, 내가 쓰러지면 풀 줄 알았지..."

당신이 911에 전화를 할 줄은 몰랐어..".


그리고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나 사실… 내가 쓰러지면 네가 울면서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하면서 손 잡아줄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 내가 완전 오판을 한 거지...."


생각해 보면…

내가 예전에 ‘베란다에서 뛰어내린다’ 했을 때

네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히 문 닫아버렸잖아,

그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그의 고백에 잠시 말이 막혔다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그날 쓰러진 건 남편의 몸이 아니었다.

남편의 체면, 자존심, 그리고

‘내가 쓰러지면 아내가 나를 붙잡아 줄 거야’라는 순진한 기대가 쓰러진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에서 결혼으로 이어지는 첫 번째 부부싸움을 치렀고,

남편은 그날 이후 '구라쟁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첫 싸움에서 완. 전. 대. 패. 했다.


남편은 지금도 가끔씩 투덜댄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 내가 평생 이겨본 적이 없다니까.....


그리고 그는 그 싸움에서 중요한 걸 배웠다고 했다.

사랑도 웃음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자존심이 가장 먼저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들이 찾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을 견뎌내는 것이야말로 부부가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라는 것을.


나 역시 지금도 가끔 남편을 놀린다.

말다툼이 시작되면 슬쩍 휴대폰을 들고는 이렇게 말한다.


"911 불러줄까?"


그러면 구라쟁이 남편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듯

토끼눈을 하며 말끝을 얼른 죽인다.


그런 남편이, 나는 너무 사랑스럽다.

어쩌면 결혼이란,

서로의 자존심을 쓰러뜨리면서도 끝내 웃음을 잃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미지 제작 도움: ChatGPT (AI 이미지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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