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헤엄치며 살아가는 중
김헌 교수는 그의 저서 <천년의 수업>에서 우리에게 아홉 가지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 질문은 수천 년 전부터 인류가 끊임없이 고민해 온 문제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를 비롯해, 고대 그리스 신화와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 역시 이 질문을 중심에 두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 물음 앞에 서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가장 강렬하게 드러내는 인물은 바로 오이디푸스일 것이다. 그는 불확실한 자아정체성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테베의 왕 라이오스와 왕비 이오카스테는 그들의 아들이 장차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운명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두 사람은 이를 피하고자 아이를 발에 못질을 한 채 버리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아들 오이디푸스는 다른 왕가에 입양되어 자라난다.
오이디푸스는 훗날 자신이 그러한 운명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신탁을 피하려 코린토스를 떠난다. 하지만 떠나는 여정 속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과 다투다 그를 죽이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자신의 생부 라이오스였다. 이후 그는 테베의 위협이던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며 테베의 왕이 된다. 심지어 그의 생모이자 테베의 왕비였던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모든 진실을 모른 채 결국 신탁의 예언을 그대로 실현하게 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화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정체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만다. 그가 보여주는 삶은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피할 수 없는 여정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김헌 교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 자기 인식의 복잡함을 풀어내고자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을 코린토스의 왕자라 믿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우리는 종종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과연 그 믿음은 옳은 것일까? 내 안의 나는 정말 하나일까?라고 되물어보아야 한다.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는 다를 수 있으며, 때로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나 또한 존재한다. 이처럼 자아는 단순하지 않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때로는 충돌하고, 겹쳐지는 여러 모습들 속에서 우리는 혼란을 느낀다.
김헌 교수는 <천년의 수업>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꼭 알아야만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지만, 소포클레스는 “너 자신을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이 두 문장은 자기 인식에 대한 갈망과 동시에 그것의 한계를 인식하는 겸손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결국, 가장 쉬워 보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가장 어렵다는 사실을 우리는 새삼 깨닫게 된다.
조성모의 노래 ‘가시나무’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서…”
이 문장은 얼핏 들으면 다중인격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나’를 경험한다. 어떤 ‘나’는 과거의 나와 다르고, 또 어떤 ‘나’는 미래의 나와도 다를 것이다. 진정한 나를 찾는 여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며 '나를 안다'는 것 역시 그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고통스럽고, 때로는 혼란스럽지만 결국 더 나은 이해와 성찰로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 자체가 바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가장 솔직한 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