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의 숨(Breath of the Fungus)

나의 첫번째 시나리오

by 소구미

이 이야기는 구조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자기를 돌보는 법을 배운 적 없던 사람이

조심스레 자신에게 말을 걸어보는 이야기다.

읽는 이에게 이 말이 닿기를 바란다.


“살아 있어서 고마워.”


당신이든, 나든, 누구든.


– 2025년 회복의 가을, 종달




S#1 밤 11시, 성희의 방


한 밤중에 타자를 치며 기획서를 작성 중인 성희.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고, 화면에 “찐친주연♡”이 떠 있다. 바로 멈추며 당장 전화를 받는 성희. 주연이 엉엉 울면서 말한다.

"성희야, 나 보이스피싱 당한 것 같아!!"

"뭐???!!! 얼마???"

"300만원!! 내 3개월 알바비 다털렸어...나 어떡해...어떡해..성희야.."

"괜찮아, 주연아. 괜찮아. 걱정말고, 일단 숨좀고르고 쉬고 있어봐. 내가 내일 월차 쓰고, 좀 알아볼게."


S#2 이른아침, 도로에서 경찰서까지


도로 여기저기 뛰어 다니는 성희, 곳곳에 전화를 하고, 경찰서에 들어간다. 상황설명을 하고 있는 성희가 경찰서 유리창 너머로 보인다.

S#3 늦은 오후, 공원 벤치


불안한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성희. 전화벨이 울린다. 지체없이 당장 받는 성희.

"경찰선데요, 그 사람들 절대 못잡아요. 금액도 얼마되지도 않고, 몇천 털린사람들도 다 줄서있는데...."

"네, 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한참 설명을 듣고 있는 성희. 통화가 끝나고 크게 한 숨을 쉬며 핸드폰을 떨군다. 성희는 결심한듯 휴대폰을 다시 줍고 은행앱에서 적금을 깨고 300만원을 주연에게 보낸다. 보내는 사람 이름은 금융감독원으로 바꾼다. 그리고 바로 주연에게 전화를 거는 성희. 주연은 다소 한가롭게 전화를 받는다.

"응, 성희야. 어떻게 됐어?"

"방금 돈 들어갔을거야. 다행히 잘해결 됐네."

"진짜??? 대박!! 역시 너 밖에 없다. 보이스피싱으로 잃은 돈 찾기 진짜 힘들다던데, 내 친구 진짜 대박이다!! 이러니 너를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난 무슨 일 생기면 가족은 모르겠고 진심 너만 생각난다니까."

살며시 미소 짓는 성희.

균의 숨 (Breath of the Fungus)

S#4 일요일 오후 2시, 성희의 방


주말에도 바쁘게 일하는 성희, 갑자기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이 온다. 주연이 보낸 쇼핑몰 옷을 캡처한 사진이다.

핸드폰 화면 카톡 쓰는 장면 클로즈업.

"이 옷 어때? 나랑 잘 어울릴것같아?"

"응 잘어울릴듯!"

"근데 너무 비쌈ㅜㅜ"

"나 일주일 뒤 알바비 들어오는데, 품절 될까봐ㅜㅜ"

"아, 내가 빌려 줄수 있어. 얼마 보내줄까?"

"진짜?ㅜㅜ 역시.. 넌 나의 영웅이야!!"

"그럼 3만원만 부탁해용~~♡♡"

"내 계좌 알징???ㅎㅎ"

"응 바로 보냈어^^"

"역시 내친구!!! 사랑해♡♡♡"

"나둥♡"


카톡을 끝내고 웃으며, 다시 타자를 치기 시작한다.

S#5 일요일 오후 5시, 성희의방


일을 마무리 하는 듯 노트북을 덮고 산책을 나가는 성희. 공원을 걷다 우연히 나무에 핀 버섯을 발견한다. 뭔가에 홀린 듯 빤히 버섯을 한참 바라본다. 사진을 찍어 주연에게 보낸다.


핸드폰 화면 클로즈업

주연과 카톡을 주고 받는다.

성희: 이 나무 너무 불쌍하지 않음? 너무 힘들어보여ㅜㅜ

주연: 그래? 난 잘 모르겠음!ㅋㅋㅋㅋㅋ 너무 갬성돋고 이쁜데?ㅋㅋㅋㅋㅋ

성희: 나무가 곧 죽을 것 같아ㅜㅜ

주연: 에이 설마? 나무 멀쩡하네 뭐ㅋㅋㅋ

성희: 아니 진짜 버섯이 너무 무섭게 생겼어ㅎㄷㄷ

주연: 버섯도 이미 나무가 썩어가니까 생긴거 아니겠어? 너무 나무 걱정만 하는 거 아니야??ㅋㅋ이 친구 걱정이나 좀 해주라!ㅋㅋㅋㅋㅋ

성희: 왜 무슨 일 있어?

주연: 있다 밤에 연락할게~

S#6 화요일 밤 11시, 성희의 방


오늘도 집에서 야근 중인 성희. 다소 지쳐보인다. 갑자기 핸드폰 카톡 알람이 온다. 핸드폰 클로즈업.

팀장님: 성희야, 일하고 있지? 하는 김에 이것도 좀 부탁할게! 이건 금방 끝날거야.

팀장님: 선화기업 매출분석.doc

성희: 네, 알겠습니다. 팀장님.

보고있던 핸드폰을 책상에 떨구며 한숨을 크게 쉬고 의자에 기대어 눕는다. 평소보다 많이 지쳐보이는 성희. 익숙하게 주연의 핸드폰 번호 뒷자리를 누르고 주연에게 전화를 건다.

"주연아, 뭐해?"

"나? 나 방금 너한테 전화하려고 했는데! 역시 우린 잘맞다니까!"

살며시 미소를 짓는 성희. 지친 상태로 주연에게 전화 했지만 힘든 기색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주연은 할 말이 많다며 계속해서 말을 한다.

"아니, 진짜, 내말 좀 들어봐봐..."

말소리는 분명하지 않지만 수화기 넘어 흥분한 듯한 주연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아.. 그건 좀 그렇다."

전화를 매우 집중해서 듣는 성희, 다소 과장되게 공감하고 반응하는 듯 보이고, 이상할 정도로 긴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다.

"내 생각엔 걔가 너무 한 것 같은데?"

중간 중간 성희의 반응은 어딘지 모르게 강하고 든든한 느낌을 준다.


S#7 화요일 밤, 성희의 방에서 공원까지


주연의 전화를 끊으며, 미소를 짓는 성희.

표정은 힘을 내는 듯 보이지만 얼굴색은 많이 지쳐보인다.

다시 힘을 낸다는 듯이 입술을 굳게 다물고, 팀장이 보낸 파일을 보고 다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일을 끝내고 팀장 카톡으로 파일을 보낸 뒤 드디어 노트북을 접는다.

답답한듯 크게 한 숨을 쉬고, 기지개를 켠 뒤, 밖으로 나간다.

어두운밤 길, 하늘을 봤다 바닥을 봤다 휘청휘청 걷는다.

주변이 매우 흐리게 보이는 성희의 시선.

계속 하염없이 걷다 갑자기 버섯이 핀 나무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때 부터 결연에 찬듯 빠르고, 바른 걸음으로 걸어간다.

그리고는 버섯이 핀 나무 앞에 선다. 빤히 쳐다 보는 성희.


"힘들지? 아프지? 왜 안힘들겠어? 그치? 힘들지?"

눈물을 글썽이는 성희. 그리고는 갑자기 버섯이 핀 나무의 버섯을 천천히 떼어내기 시작한다.

"이제 좀 나아?"

점점 더 격렬히 울기 시작하고 마구잡이로 떼어낸다. 급기야 버섯을 뜯자마자 마구 먹어댄다. 그리고는 쓰러진다.

S#8 낮


"공원에 핀 버섯 먹다 버섯 중독으로 쓰러져"

라는 기사의 헤드라인이 적힌 스마트폰 화면. 그냥 무심히 넘기는 손짓.


S#9 낮, 공원


버섯이 핀 나무 서서히 클로즈업.

나무 주위로 버섯이 떼어져 흩어져 있다.

그 버섯을 맛있게 먹는 청솔모가 보이고, 급하게 먹더니 하나를 움켜지고 유유히 숲으로 뛰어간다.

페이드 아웃.


S#10. 새벽, 숲 깊은 곳. 성희의 꿈 속.

흙냄새가 난다.

이슬에 젖은 풀잎이 얼굴을 간질인다.

성희의 눈이 천천히 떠진다.

아무 말도, 소리도 없다.

성희는 바닥에 누워 있다.

입가에 말라붙은 버섯 조각.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본다.

숲이다. 낯설고도 익숙하다.

천천히 일어나는 성희.

몸을 간신히 가누며 주변을 걷기 시작한다.

버섯이 피었던 나무가 보인다.

전보다 훨씬 적은 버섯.

나무 껍질은 벌어져 있지만, 틈 사이로 연한 초록빛 새순이 나 있다.


성희는 멈춰 선다.

나무를 바라본다. 말 없이.


잠시 후, 다가가 나무에 손을 댄다.

손바닥이 껍질의 거친 표면을 느낀다.

그 위로 손가락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성희가 속삭이듯 말한다.


“...살아 있었네.”


나무에 기댄다.

양손으로 껴안는다.

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울지 않는다.

작게 이야기한다.


“나도... 괜찮을 수 있을까?”


나무 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햇살이 숲 사이로 스며든다.

작은 벌레 소리, 새소리.

모든 것이 조용하지만, 살아 있다.


성희는 나무 아래 천천히 주저앉는다.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히 앉는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나무 그림자가 성희를 천천히 덮는다.

카메라는 멀어지며 숲 전체를 비춘다.

아직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있지만,

중앙에 앉은 성희는 분명히 깨어 있다.


페이드 아웃.


S#11. 오전, 성희의 방


햇살이 비친다. 커튼이 걷혀 있다.

방 안은 조용하다. 여전히 어질러져 있지만, 공기 속엔 어딘가 낯선 평온이 감돈다.


성희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천천히 둘러본다.

익숙하지만 낯선, 자기만의 공간.


가방을 내려놓는다.

구겨진 이불, 쌓인 설거지, 어제까지 쳐다보지도 않았던 것들.


성희가 혼잣말을 한다.


“...너무 오래, 안 봤구나.”


성희는 옷을 벗고 손을 씻는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본다.

초췌한 얼굴, 부은 눈, 갈라진 입술.

하지만 이번엔 그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만히 들여다본다.

잠시 침묵


작게 속삭이며,

“그래도 살아 있네.”


천천히 움직인다.

이불을 개고, 노트북을 닫고, 책을 책장에 꽂는다.

쓰다 버린 커피캔을 버리고, 바닥에 떨어진 영수증들을 모은다.


눈에 띄는 파란색 노트 한 권.

펼치자,

맨 앞 장에 ‘기획서 초안’이 적혀 있다.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적힌 문장.


“너무 무너지지 말자. 아직은.”


한참을 바라보다 노트를 덮는다.

이번엔 그 위에 포스트잇을 한 장 붙인다.

볼펜으로 적는다.


“괜찮아, 나도 나를 좀 돌보자.”


책상 위에 조용히 놓는다.

노트 위로 햇살이 떨어진다.

성희는 창문을 열고,

방 안에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살며시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신다.


페이드 아웃.


S#12. 오후, 전시회


지하철이 터널을 지난다. 창밖으로 어른거리는 터널 벽.

성희가 조용히 창밖을 바라본다.

이어폰을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 눈을 감는다.

컷.


전시회 입구.

‘균과 나무 – 공존의 생태’ 라는 작은 글씨가 적힌 포스터.

버섯과 나무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성희가 들어선다.

조용한 음악,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안내 음성.


벽에 걸린 사진들:

부패한 나무 위의 버섯들

썩은 뿌리 사이로 자라는 이끼

죽어가는 나무 옆의 새로운 묘목


성희가 사진 하나 앞에 멈춰 선다.

제목: “공생의 상처”

사진 설명 아래에 적힌 문구: “버섯은 죽음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썩은 것을 분해해 다시 생명을 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성희가 조용히 눈을 깜빡인다.

다음 사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진 제목:

“균의 언어로 말하다”


사진에는 버섯이 덮인 나무둥치가 있고, 그 옆에 누군가 손으로 조심스럽게 버섯을 만지는 장면이 있다.

사진 속 손의 표정이 마치 위로하듯, 어루만지듯 보인다.

컷.


성희의 손이 자신의 가슴 위를 잠시 짚는다.

그리고 천천히 내린다.

컷.


기념품 코너.

성희는 작은 버섯 엽서 세트를 집어든다.

그 중 하나를 선택해 계산한다.

엽서엔 이렇게 적혀 있다.


“균은 숨을 쉰다. 나도 숨을 쉰다.”

성희는 엽서를 조심히 가방에 넣는다.

전시장을 나서며, 입구 쪽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다.

그 빛을 조용히 올려다보는 성희.

페이드 아웃.

S#13. 밤, 성희의 방


창문 너머로 가을 바람이 불어온다.

조용한 방 안, 작은 스탠드 조명이 켜져 있다.

성희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앞에 놓인 건 전시회에서 산 버섯 엽서.

엽서 한쪽 구석엔 작고 흰 버섯이 그려져 있다.

그림 옆에 공간을 남겨두고, 성희가 펜을 든다.

잠시 멈칫.


그냥 바라본다.

그동안 수없이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신 써줬던 손이

이제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엽서 자막 (성희의 내레이션)


성희야,

네가 얼마나 참았는지 알아.

네가 얼마나 애썼는지도 알아.

너무 늦게 말 걸어서 미안해.

이제 조금씩 네 편이 되어줄게.

버섯이 다 나쁜 건 아니래.

상처 위에 피어난 것도, 결국 너였어.

살아 있어서 고마워.

정말.

– 너로부터

성희는 엽서를 조심히 접는다.

봉투에 넣지도 않는다.

책상 서랍을 열고,

엽서를 꺼내기 쉬운 자리에 조용히 넣는다.

스탠드를 끄고

이불을 펴고 눕는다.

눈을 감는다.

긴 숨을 내쉰다.

이번엔 아주 편안한 숨이다.

카메라는 천천히 멀어진다.

방 안에는 아무 음악도 없지만

공기는 안정감과 조용한 따뜻함으로 가득 차 있다.

페이드 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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