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막는 것, 나

2025-1 5주차 여영추 <블랙 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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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게 착각은 아닐까? 그리고 그 욕망을 가로막는 존재를 우린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블랙 스완>과 함께 살펴보자.


뉴욕 유명 발레단의 무용수 니나는 완벽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연습 벌레다. 메인 무용수였던 베스가 더 이상 공연을 못하게 되자, 차기 작품의 주역 오디션이 열린다. 차기 공연은 ‘백조의 호수’. 주인공은 순수한 순백의 백조와 관능적이고 어두운 흑조라는 상반된 쌍둥이의 1인 2역을 해내야만 하는데, 니나는 이 배역이 욕심이 난다. 결국 주연에 발탁된 니나는, 백조와는 어울리지만 흑조의 집요하고 매혹적인 캐릭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자신을 내려놓으라는 이해할 수 없는 지적을 받던 도중,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너무나도 자유분방하고 매혹적인 릴리가 발레단에 들어온다. 니나는 점점 압박감을 느끼고, 불안해하고, 니나가 그럴수록 니나의 어머니인 에리카는 그녀를 더 단속하고 저지한다. 철저한 절제와 강박 속에서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인지하지도 못했던 니나는 자신의 욕망을 서서히 인지하고 욕망과 강박에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결국 모두 다 자신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 받아들인 자신 모습들을 예술로서 승화시킨다.


<블랙 스완>은 니나의 자아 찾기 서사이다. 프로이트의 자아 이론을 빌려오자면, 이 영화와 다른 여러 콘텐츠와 텍스트에서 주로 아버지로 비춰지는 초자아는 끊임없이 특정한 이상향을 정해놓고 자기를 검열한다. 그리고 주로 유혹의 대상 또는 욕망을 끌어올려 주는 어떤 사람 내지 것(이 영화에서는 릴리와 흑조 역할)인 이드는 자신의 감춰져 있던 욕망을 들끓게 만든다. 이드와 초자아와 그 사이 어딘가의 자아가 끊임없이 싸우고 서로를 비난하고 검열하다 하나의 자아로 합일되는 것이 인물의 성장이라고 볼 수 있다. 에리카의 끊임없는 검열과 감시와 억압에 지쳐 있었지만 무엇이 잘못된지도 몰랐던 니나가 흑조 역을 소화해 내야만 자신이 꿈꾸던 배역과 최고의 자리를 취할 수 있게 되면서 감춰져 있던 욕망이 드러나고 이를 자유분방하지만 위험하고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인 릴리를 통해 터트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니나는 어머니의 말이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자신이 더 대단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제야 어머니와 그녀가 만들어낸 자신을 이겨내려면 자신의 욕망(인정욕구, 성적 욕구)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인지한다. 그리고 자신을 위협하던 자신이 만들어낸 망상 속의 나쁜 릴리를 죽임으로써 분열되었던 자신의 조각들이 하나로 합일되는 모습까지 영화는 담고 있다. 누구나 경험해 봤을 부모 세대로부터 벗어나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은 시기를 이 영화 이 보여주고 있다. 또, 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묘사되는 초자아와 자아의 관계를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바라보았다는 지점에서 여성학적 분석이 가능하다.


니나는 어머니의 억압과 편견과 통제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나이, 신체,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쩌면 니나를 억압했던 것은 스스로가 아닐까. 스스로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아.’라는 남들이 정하거나 비난한 적도 없는데 윤리적 강박에 시달렸던 건 아닐까. 또 법으로 정해진 게 아니라면, 나의 욕망과 나 자신이 남들이 정한 프레임과 비난에 구부러질 필요가 없지 않나. 나 스스로에게도 되묻게 된다. 여성이기에 정해진 프레임 속에, 딸이기에, 누나이기에 정해진 프레임 속에 나를 가둬두진 않았는가. 나 자신의 욕망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엄마는 아직도 나에게 착한 딸, 말 잘 듣는 딸이 돼라 말한다.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어떻게 더 착해. 어떻게 더 말 잘 들어. 그냥 이대로 받아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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