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 6주차 여영추 <티 타임>
영어 속담 ‘a storm in a teacup’(찻잔 속의 폭풍)은 찻잔 속 커피를 휘저을 때 작은 공간에서는 커다란 소용돌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영향력이 미미해 주변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상황을 비유한다.
찻잔 하나를 한 사람의 생애, 한 사람의 세계라고 일컫자. 여기 1944년부터 60년, 반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서로의 찻잔을 맞대며 우정을 지속해 온 다섯 명의 칠레 여자들(알리샤, 헤마, 앙헬리카, 히메나, 테레사)이 있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 달에 한 번씩 차를 마시는 월례 행사를 하는 막역한 사이다.
달짝지근한 차, 그리고 디저트에 풍미를 더하는 것은 단연 그녀들의 거침없는 입담이다. “흉한 망토 아래 훌륭한 검이 있는 법이야.”라고 과감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구사하는 그녀들은 이성과 섹스, 정치 성향, 그리고 죽음 앞에서 누구보다 솔직하다.
대화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 - 가정 내 어머니의 역할, 전업주부와 직장인 여성의 삶, 여성의 순결, 동성애, 남편의 외도, 비혼주의 여성 등 - 이 과정에서 이들은 기존에 지니고 있던 여성성의 개념을 새롭게 재구성한다.
미국의 심리학자 캐롤 길리건은 저서 『다른 목소리로』에서 ‘돌봄의 윤리’(Ethics of Care)에 대해 언급한다. 돌봄의 윤리란 여성이 관계, 연대, 지속적인 돌봄을 바탕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자아를 발견한다는 내용의 이론이다. 나중에 합류한 이네스까지 총 여섯 명으로 구성된 티 타임 모임은 단순한 사적 모임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돌보고 지탱하는 실천적 공동체의 장으로 바라보는 것이 옳다. 소통이 이루어지는 순간, 더 이상 폭풍은 찻잔 속에만 머물지 않는다.
“먼저 죽는 남편과 바람피우는 남편, 여자들은 누구를 더 좋아할까?"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섯 인물의 캐릭터이다. 앙헬리카는 겉으로 보수적인 사람처럼 보이지만 제일 애교가 많은 인물이다. 평생 속을 썩인 바람둥이 남편을 쉴 새 없이 욕하면서도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며 정성껏 돌본다. 한편, 헤마는 모임의 구성원 중 유일하게 결혼한 적이 없는 여성으로 이성이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꺼린다. 나머지 친구들은 처음에는 헤마가 결혼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곧 그녀가 다만 사랑에 빠진 적이 없을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헤마의 선택을 존중한다.
주인공들과 관계된 주변 인물 역시 놓칠 수 없다. 이 작품에선 지속적으로 페루인 하녀가 등장한다. 이들은 여성의 순결이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이야기하다가 매춘부와 하녀에 대해 언급하고, 이들의 대화를 듣던 하녀는 불편해진 나머지 자리를 피한다. 또한 다 함께 텔레비전으로 축구 경기를 보는 장면에서 “페루가 골을 넣으면 하녀한테 축하해주자.”, “페루인 환영은 지금도 과하다고. 대성당 한쪽도 내줬지.” 등 하녀에게 무례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여기서 칠레, 페루 모두 과거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 이후 나뉜 상하관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테레사의 딸 프란시스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프란시스카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테레사는 친구들이 없었으면 프란시스카의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슬퍼만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프란시스카의 음악회 장면이다. 카메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프란시스카를 비추는 대신 그녀의 연주를 듣는 여자들의 반응 샷만 끈질기게 보여준다. 멜로디가 엇나갈 때마다 흠칫 놀라는 이들의 반응이 매우 생생하게 재현된다. 이들은 프란시스카의 서툰 연주에도 불구하고 “브라보!”라고 외치며 열렬한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프란시스카와 테레사의 똑같이 생긴 손톱에 대해 “이런 게 유전되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너희 인생에서 사라지겠어?” 이들이 나이 듦,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프닝에서 인물 소개가 이루어진 다음, 옛 친구 미미가 죽었다는 소식으로 첫 장면이 시작된다. 이들은 모임마다 애도, 감사의 감정을 담아 기도하면서도 “죽음은 불가해한 게 아니야. 계산할 수도 없지.”라며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이들의 우정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감독 마이테 알베르디는 자신의 친할머니가 자신의 고등학교 첫 단편 영화 상영회 때 친할머니가 오지 못한 이유가 ‘티 타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이 작품을 찍고자 했다. 1시간 10분 간의 러닝타임 동안 노부인들이 주고받는 말들에는 삶의 희로애락(喜怒愛樂), 그리고 인간애의 정서가 듬뿍 담겨 있다. 그녀들의 티 타임에 동참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작품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