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스피치〉를 통해 발견한 고독의 정체와 사랑의 힘
“아빠는 어릴 적 언제가 제일 무서웠어?”
“글쎄? 아빠는 혼자 있을 때 제일 무서웠지.”
“에이, 아빠 겁쟁이였구나.”
보배단지에게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그 두려움의 정체는 단순한 ‘혼자 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독'이라는 텅 빈 공간 속에서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는 ‘말할 수 없음’이라는 절벽이었습니다. 무서웠던 것은 어둠 자체가 아니라, 어둠을 홀로 견디며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버텨야 했던 그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침묵은 고독을 낳고, 고독은 다시 두려움의 파도가 되어 나를 덮치곤 했습니다.
공포가 사람을 무너뜨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공포 자체가 아니라 그 공포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단절감이 우리를 붕괴시킵니다. 바로 '고독'이라는 존재입니다. 가장 처절한 전쟁과 재난 속에서도 누군가와 손을 맞잡고 있다면 인간은 놀라울 만큼 버텨냅니다. 그러나 고독은 나누어지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 내면에 말라버린 꽃처럼 번져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말할 수 없음’이 더해지는 순간, 그 무게는 존재를 짓누르는 짐이 됩니다. 목소리는 내가 존재한다는 증명이며 세상과 연결된 마지막 끈인데, 그 끈이 끊어지는 순간 우리는 외로움을 넘어 존재의 유기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할 수 없는 고독’을 왕관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짊어진 인물이 있습니다.
영화 〈킹스 스피치〉 속 조지 6세, ‘버티’입니다. 그는 제국의 정점에 서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 안에 갇힌 가장 가련한 군주였습니다.
내면의 불협화음을 조율하다
버티의 말더듬증은 단순한 언어 장애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억압과 수치심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내면의 감옥'이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왕좌에 오른 그에게 대중의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이었고, 마이크는 자신의 취약성을 폭로하는 고문의 도구였습니다.
이때 등장한 언어 치료사 라이오넬 로그는 왕의 발성을 교정하기보다 그의 마음의 빗장을 여는 데 집중합니다. 그는 왕을 ‘버티’라 부르며, 그가 왕관 뒤에 숨긴 상처 입은 인간임을 일깨웁니다. 로그의 작업실에서 버티가 분노와 좌절을 쏟아내는 과정은, 마치 뒤틀리고 삐걱거리던 내면의 현악기들을 하나하나 정돈하는 오케스트라의 조율 시간과도 같았습니다. 자기 수용이라는 첫 음을 제대로 짚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목소리의 울림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운명의 선율: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
1939년, 세계 대전의 포화 속에서 영국 국민의 운명을 짊어진 버티가 마이크 앞에 섭니다. 긴장으로 얼어붙은 그의 등 뒤로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낮은 현악기들이 '다-다다-다다' 하며 심장 박동처럼 반복하는 그 엄숙한 리듬은, 흔들리는 왕의 심장에 질서정연한 박동을 부여합니다. 이 곡은 슬픔을 담고 있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패배를 거부하고 위엄 있게 나아가는 영혼의 행진곡에 가깝습니다. 왕의 목소리가 단어를 찾아 머뭇거릴 때마다, 베토벤의 웅장한 화음은 그 빈틈을 메우며 그를 지탱하는 심리적 방패가 되어줍니다.
음악은 왕의 결핍을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결핍과 싸우며 한 걸음씩 내딛는 그의 용기를 증명해 줍니다. 연설이 끝난 후, 로그와 나누는 짧은 눈 맞춤은 개인의 트라우마가 공적인 사명 속에서 마침내 초월되었음을 알리는 조용하고도 장엄한 피날레였습니다.
당신의 불완전함이라는 가장 고귀한 왕관
우리는 흔히 완전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정작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늘 자신의 불완전함뿐입니다. 하지만 조지 6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당신의 불완전함이야말로 가장 진실한 왕관이며, 그 흔들림 속에서 내뱉는 진심이기에 당신은 더 위대하다”고 말입니다.
우리 내면에도 여전히 떨고 있는 ‘말더듬는 버티’가 존재합니다. 그를 외면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떨림은 고난을 통과해온 시간의 증거이며, 당신이 살아있다는 뜨거운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심리적 장애를 극복한다는 것은 흠 없는 완벽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안고도 기꺼이 세상 앞에 서는 결단입니다.
이제 당신의 내면에 잠재된 웅장한 질서와 힘을 믿으십시오. 베토벤의 화음이 시간을 초월해 울려 퍼지듯, 당신의 자기 확신 또한 세상을 향한 위대한 심포니가 될 것입니다.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첫 단어를 내뱉을 작은 용기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 용기 있는 발걸음 뒤에는, 당신의 목소리를 판단 없이 들어줄 당신만의 ‘로그’가 반드시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럼, 아빠는 무서울 때
누구랑 같이 있으면 안 무서워?”
“응, 아빠만의 ‘로그’.”
“로그가 누구야?”
“응..., 바로 너야~!”
보배단지의 맑은 눈망울을 보며 생각합니다. 내 목소리가 떨릴 때 나를 지탱해 주는 이 보배로운 존재가 있기에, 나의 삶이라는 대서사시는 오늘도 당당히 다음 악장으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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