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함이라는 성벽에 균열을 낸 사소한 의문
얼마 전 가족들이 외출한 후, 혼자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 중이었다. 그러다 유명 피자 프랜차이즈점에서 1+1 행사를 하고 있다는 광고를 발견했다. 망설임 없이 주문. 두 판 중 하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하와이안 피자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피자에 대해 오해를 한다. 사실 나 역시 처음엔 그랬다.
“이 하와이안 피자는 언제 하와이에서 왔을까? 그런데 정말 하와이 출신이기는 할까?”
답은 전혀 아니다. 피자 위에 파인애플을 올린 사람이 있다. 이름은 샘 파노풀로스(Sam Panopoulos, 1934~2017). 그가 이 작은 실험을 감행한 곳은 캐나다 온타리오주 채텀에 있던 'Satellite Restaurant'이었다.
1960년대 초, 그리스 이민자로 정착해 식당을 꾸리던 그는 어느 문화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스의 맛을 기억하면서도 캐나다의 식탁에 발을 딛고, 당시 중국 음식의 '단짠' 유행을 곁에서 바라보던 경계 위의 사람이었다. 어쩌면 경계에 서 있었기에 그는 경계를 더 가볍게 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 경계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1mm 너머의 선택을 한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피자에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단짠!'
거창한 선언은 없었다. 전통을 뒤집겠다는 포부도 없었다. 그는 통조림을 하나 열어 시럽을 부어버리고, 햄 위에 노란 과육 몇 조각을 올렸다. 그 외에 주방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피자는 여전히 구워지고 있었고, 주문은 계속 들어왔다. 하지만 나중에 사람들은 말하게 된다. 바로 그때 세상의 경계가 움직였다고. 짭짤한 식사와 달콤한 디저트를 구분하던 엄격한 선이,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옆으로 딱 1mm 밀려났다고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름에도 숨어 있다. 왜 사람들은 이 피자를 '하와이안'이라고 부를까?
많은 이가 태평양의 푸른 섬을 떠올리지만, 사실 그 이유는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 그가 사용한 파인애플 통조림의 상표가 'Hawaiian'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열대의 이미지를 내세우던 브랜드 전략 덕분에, 하와이라는 단어는 이미 달콤함과 휴양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어 있었다.
캐나다에서, 그리스 출신 이민자가, 북미의 유행을 참고해 만들었는데 이름은 하와이가 된 것이다. 메뉴의 이름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주방 선반에서 바로 가져온 우연한 단어였고, 이 피자는 태생부터 이미 어느 한 곳에 귀속되기를 거부한 음식이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자 이 피자는 뜻밖의 장소에서 거센 비판을 받게 된다. 피자의 전통을 자부하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는 특히 그랬다. 엄격하게 전수된 기준 속에서 과일은 토핑이 아니라 불청객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창의성이 아니라 '신성모독'에 가까운 침범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묻는다.
허용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 이 질문이 수십 년간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겨우 과일 한 조각이었는데 말이다.
어쩌면 사람들을 자극한 건 맛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을지 모른다. 누구도 건드리지 않던 합의, 오래되어 굳어버린 기준, 굳이 다시 묻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던 무의식적인 규칙들. 그 견고한 성벽 위에 파인애플 한 조각이 올라가며 조용히 속삭인 것이다.
"왜 안 되지?"
이것은 1mm의 이동이었다. 거의 티도 나지 않을 만큼 작은 차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미세한 변화 앞에서 우리는 가장 크게 흔들린다. 규칙이 '취향'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순간, '절대'라고 믿었던 것이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로 바뀌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도 이와 같다. 거창한 혁명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당연하다고 믿었던 자리에 1mm의 의문을 살짝 밀어 넣는 것, "원래 그래"라는 문장을 "꼭 그래야 할까?"로 바꾸는 그 아주 작은 틈새에서 창의는 시작된다. 파인애플 피자를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그 에너지는, 사실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정답에 대한 강박'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녀석을 1mm만 밀어버려야 한다.
누군가는 여전히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저건 피자가 아니라고. 그래도 괜찮다.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그 대답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끝나지 않는 논쟁이 우리를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어놓은 경계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선을 처음 그은 사람이 도대체 누구였는지를.
어쩌면 그 선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 나는 나만의 1mm를 옮겨보려 한다. 딸 보배단지를 위한 간식으로 미니소시지가 들어간 파전에 파인애플을 올린 부침개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아이의 입가에 번질 즐거운 미소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자, 우리 모두의 일상을 위하여, 그리고 “단짠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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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mm의 심연, 수면을 벗어나 심해로: 사유의 바다로 들어간 사람들 (2026-2-26)
[5] 1mm의 틈, AI 거울 앞에 선 인간의 욕망: 인류의 선택은? (2026-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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