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B #03

고래밥 팝콘은 왜 없는가

by The Lazy Lab

이전 컬럼에서 신나게 길어진 내 서사를 먼저 읽고 와도 좋다.

하지만 이번 글의 제목을 따라가는 본론은 지금부터 시작되니, 시간이 없거나 그냥 심플리 귀찮다면 이 컬럼부터 바로 읽어도 된다. 아무 상관없다. 나는 그런 거 관대하다.


언젠가 한국의 취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때가 있었다.

(사실 지금도 헤매고 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는 날이 많다. 그럼에도 불경기니까, 취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려고 노력 중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대학교 동기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왔고, 우리는 함께 취업박람회에 가기로 했다.

내 단점 중 하나는 ‘정보력의 부족’인데,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정보는 곧 무기라는 걸 실감하고 있던 참이었다. 없는 정보를 쥐고 전장을 뛰는 건 거의 맨손 전투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밟는 캠퍼스는 괜히 설레었고, 나는 큰 기대 없이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런 게 다 있었나 싶었다.

대기업들이 다 모여 있었고, 학생들과 졸업생들을 상대로 컨설팅을 해주고 있었다. 면접, 취업 준비, Q&A까지. 나는 이 기회다 싶어 가고 싶은 회사들을 하나하나 방문했다.

그중에 눈에 띈 곳이 CGV였다.


F&B와 엔터 산업에 원래 관심이 많았던 터라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CGV가 뭘 하고 있는지, 최근의 신메뉴나 마케팅 전략이 어떤지 정도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CGV 부스 담당자에게 다가가 내 얘기를 시작했다.


내가 CGV에서 제일 아쉬운 점은 영화관 메뉴였다.

물론 시도는 있었다.

예전에 죠스떡볶이와 콜라보해서 만든 닭강정 소스 김말이 튀김 같은 메뉴—아주 맛이 형편없었다.

그 이후로도 김치 팝콘 같은 실험적인 메뉴들이 나왔지만, 치토스 팝콘만큼의 열광이나 충성도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요즘 롯데시네마만 간다고. 그 이유는 단 하나, 치토스 팝콘 때문이다.

CGV도 그에 상응하는 메뉴를 내놓는다면, 경쟁력이 생길 거라고 말했다.


나는 과자 봉지를 다 먹고 나서도 아쉬워서 손가락에 남은 가루까지 쪽쪽 빨아먹게 만드는 그런 과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과자로 팝콘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고래밥이었다.


혹시 고래밥을 기억하는가?

이 컬럼을 읽고 있는 레이지들 중 일부는 어릴 때 먹었던 그 기억이 흐릿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지금이라도 편의점에 가서 고래밥을 사먹어보라. 정말 맛있다.


칼로리도 높지 않고, 양념은 맛있고, 가볍게 즐기기 좋은 간식이다.

무엇보다 고래밥은 다 먹고 나서 손에 남은 양념이 피날레다.


나는 이 얘기들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CGV 담당자에게 말했다.

고래밥 팝콘을 출시하면 CGV를 다시 찾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고.

마케팅 방식도 제안했다.

배스킨라빈스처럼 ‘이달의 팝콘’ 시리즈로 기획을 확장하거나, 롯데시네마와 경쟁 구도를 형성해

"치토스 팝콘 vs 고래밥 팝콘"이라는 테마로 투표 마케팅을 하면 어떻겠냐고.

담당자는 좋은 아이디어라며, 꼭 자소서에 써보라고 격려해주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CGV에 자소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결과는, 서류 광탈.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서류를 통과해본 적이 없던 나는

또 하나의 불합격 소식에 점점 힘이 빠지고 있던 찰나,

SNS에서 믿기 힘든 소식을 접하게 된다.


CGV가 고래밥 팝콘을 출시했다는 것.


그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가 말했던 그 기획이 실현됐다는 놀라움.

말도 안 되게 뿌듯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묘하게 씁쓸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지금 CGV에 고래밥 팝콘은 없다.


기획이 실현됐는데도 왜 실패했을까?


바로 여기서부터가 오늘 실험의 핵심이다.

CGV의 고래밥 팝콘은 왜 실패했는가?

나는 이 실험의 관찰 결과를 두 가지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첫째, 맛의 선택에서 실패했다.


CGV는 고래밥 팝콘을 ‘볶은양념맛’이 아닌, 달콤치즈맛으로 출시했다.

이건 굉장히 근시안적인 결정이다.

“팝콘은 치즈맛이 무난하지 않나?”라는 접근.

팀장이든 본부장이든, 이사진이든—누구의 결정이었든, 만약 그런 생각으로 방향을 정했다면,


그 경영진, 바꿔야 한다.

너무 올드하다.


고래밥은 복합적인 볶은양념맛이 생명이다.

그 손가락에 남는 양념가루까지.

그걸 무난하게 치즈로 포장한 순간, 이 팝콘은 고래밥이 아니라 그냥 치즈맛 팝콘 위에 고래 모양 토핑 몇 개 올린 거에 불과해졌다.

이건 맛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결정이다.



둘째, 구성 방식에서 실패했다.


CGV는 고래밥을 팝콘 위에 토핑처럼 얹었다.

이건 롯데시네마가 초기 치토스 팝콘에서 겪었던 실패와 정확히 같은 실수다.


그때도 치토스를 위에만 뿌려주다 보니,

먹을수록 팝콘과 치토스가 따로 노는 느낌이 강했다.

결국 피드백을 반영해 치토스와 팝콘을 미리 섞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완성도가 높아졌던 것처럼,

고래밥도 처음부터 팝콘과 함께 섞였어야 했다.


이건 단순한 토핑 문제가 아니다.

구성과 흐름, 식감의 연속성에 대한 감각이다.

CGV는 이 흐름을 놓쳤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기획이 실패한 게 아니다. 실행이 실패한 것이다.


내 아이디어가 실현된 것 같아 뿌듯했지만,

그 실행이 이렇게 빗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실험실 회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CGV가 언젠가 고래밥 팝콘을 다시 실험하게 된다면,

부디 볶은양념맛으로, 그리고 팝콘과 고래밥을 미리 섞는 방식으로 출시해주길 바란다.


그건 단순한 리뉴얼이 아니라,

정정訂正이자, 진짜 기획의 복원이다.


나는 오늘도 그 팝콘을 상상하며 기다려본다.

내 실험실에서 언젠가 현실이 되어 돌아올,

진짜 고래밥 팝콘을 위해.




PS.
고래밥은 작고 가벼워서, 섞는 과정에서 부서지기 쉽다.
그래서 실물 기획에서는 기존보다 큰 고래밥을 사용하는 걸 추천한다.
물성을 고려한 설계는 언제나 실험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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