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 첫사랑 그녀를 만나다.
“엄마, 나… 누나랑 헤어졌어.”
두돌 지난 아들이 이런 말을 하진 않지만,
만약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 거다.
우리 집 자칭 슈퍼맨, 막내 혁이.
이제 막 ‘이춘기’를 끝냈다.
(참고: 이춘기 = 이른 사춘기)
이유요? 첫사랑이… 끝났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 짧고 굵었던 유치원판 러브·액션·질투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혁이는 돌이 지나자마자 데이케어에 입성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이 말이 얼마나 무거운 의미인지 육아맘들은 다 안다.
형아들 틈에서 가끔 상처도 나고, 눈물도 보였지만
사진 속 웃음을 보며 ‘잘 적응했구나’ 했다.
물론 속으론 걱정이 많았다.
왜냐면 반 평균 나이가 혁이보다 1~1년 반 많았으니까.
그야말로 ‘형아들의 세계’에 막내가 던져진 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목·금 이틀을 추가로 다니게 됐다.
첫 주 목요일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금요일부터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에는 “가기 싫어!”를
외치며 모든 무기를 총동원.
울음, 버티기, 애교, 협상…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나는 그냥 월요병인가 했는데,
그날 받은 사진 속에는 누나와 손을 꼭 잡고,
어깨동무까지 한 혁이의 모습이 있었다.
눈빛이… 사랑이었다.
아, 엄마는 헷갈린다… 헷갈려.
그 누나는 혁이보다 두 살 많은 연상 누나.
눈이 참 이쁘고, 실물은 사진보다 더 빛났다.
똘똘하고 기운찬 그 누나는
혁이 눈엔 ‘내 여자니까~’였을 것이다.
픽업 후 집으로 가는 차 안, 갑자기 혁이가 말했다.
“키스.”
“응???”
“키스! 엄마~”
“키스했어??”
“응.”
“누구랑???”
“누나~~”
오 마이갓!!!
딸을 둔 엄마로서, 머릿속에 경고등이 번쩍 켜졌다.
“이건 아니지 싶은데… 어떡하지?
물어봐야 하나? 믿어야 하나?”
어떻게 집에 온 건지 기억이 흐릿하다.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선생님이 픽업 시간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00 이가 혁이를 좀 많이 괴롭혔어요…
아이들이 혁이 엄마한테까지 이른다고,
00 이가 혁이한테도 사과하고
아주머니께도 사과하겠다고 해서요.”
옆에서 형아가 “죄송합니다”라고 했는데,
뭔가 어색했다. 그 순간 직감했다.
아… 이유가 너구나.
그날 이후 혁이의 반항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시작된 울음은,
유치원에 도착할 때까지 풀코스로 이어졌다.
차 안에서 울고, 현관 앞에서 울고,
교실 앞에서는 바닥에 드러눕는 ‘시위’까지.
문틈을 잡은 손에서 호랑이 기운이 느껴졌다.
그 표정…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띠링―
잠시 후, 선생님이 사진과 영상을 보내왔다.
“아이는 잘 있어요.”
그런데 영상을 보는 순간, 나는 모니터 앞에서 굳었다.
형아가 장난감 자동차를 들고 ‘부릉부릉~’하며
혁이의 손을 치고 있었다.
혁이는 분명 아파서 손을 빼는데,
형아는 기어코 재주행.
그 표정은 마치 “이번엔 코너링 좀 타볼까?” 하는
F1 드라이버 같았다.
이건 ‘자동차 놀이’라기보다
‘자동차 충돌 실험’에 가까웠다.
아마 선생님은 이걸 매일 있는 평범한 장면이라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오늘도 잘 논다~’ 하고 찍어 보내셨겠지.
하지만 내 눈에는 ‘잘 논다’가 아니라 ‘잘 맞는다’였다.
그 순간 알았다.
혁이가 그렇게까지 싫어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목·금반은 빼야겠다.
사연은 이랬다.
첫사랑 누나와 형아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끼리 친했고,
혁이가 목·금반으로 오고 나서 누나가
혁이를 많이 챙기자
형아의 질투가 폭발한 거였다.
이건 유치원판 겨울연가이자 펜트하우스였다.
집에 와서 혁이에게 말했다.
“이젠 그 형아가 혁이 안 때릴 거야.
엄마가 선생님한테 말했어.
이제는 괜찮아~! 근데 혁아,
이제 그 누나 못 볼 것 같아… 괜찮아?”
“…응.”
“정말 괜찮아?”
“응… 개차나.”
그렇게 좋아했던 누나였는데,
마음을 접을 만큼 힘들었나 보다.
슈퍼맨의 첫사랑은 그렇게 짧게 끝났다.
그 후 한 달 동안 새로운 데이케어를 찾아
발품을 팔았다.
이번엔 혁이와 함께 결정했다.
그리고 첫날, 혁이는 뒤도 안 보고 입장했다.
보내주신 사진 속에는
‘공중부양’과 ‘전갈자세’까지 발사.
(참고: 전갈자세 = 혁이가 최고로 행복할 때 하는 개인기)
새 반 친구들은 모두 또래, 모두 따뜻한 아이들이다.
슬픔에 빠졌던 슈퍼맨은 다시 웃음을 찾았다.
처음엔 단순히 “가기 싫다”는 말로 시작됐다.
나는 그걸 그냥 피곤해서 떼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 말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숨어 있었는지.
문틈을 잡고 안 놓던 그 작은 손.
그건 단순한 고집이 아니라,
“엄마, 제발 나 좀 봐줘”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사진 속 웃음 뒤에는 힘든 하루를 버티는 아이의 용기가 숨어 있었다.
아이의 세상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다.
그 작은 세상에서
친구 한 명,
놀이 한 번,
하루 한 순간이
모두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아이의 ‘싫다’는 말은 그냥 투정이 아니라,
그 하루를 바꿀 만큼 중요한 신호일 수 있다.
나는 이번 일을 통해 배웠다.
아이가 하는 말, 짓는 표정, 내는 한숨,
그 모든 것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걸.
아이는 아직 말이 서툴지만,
마음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엄마, 나 힘들어.”
그리고 그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이제 혁이는 새로운 곳에서 마음껏 웃고 뛴다.
전갈자세를 하며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공중부양 웃음을 날리며 하루를 즐긴다.
그 모습을 보며 안다.
아이는 결국,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곳을 만나면
다시 웃을 수 있다는 걸.
이번 사건은 웃긴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나에게는 오래 기억될 ‘엄마 수업’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나의 슈퍼맨,
네 마음의 목소리는 앞으로 절대 놓치지 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