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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반칙

붉은 가루

by 마루


​[에세이] 혀끝의 반칙, 붉은 가루

​글: 감자 공주

​워싱턴의 겨울밤은 낯설었다. 초대받은 미국인의 집, 식탁 위에 산처럼 쌓인 게 요리 앞에서 나는 조금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그때였다. 집주인 잭이 노란 깡통 하나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열자 붉은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마치 제사상에 향을 피우듯 그 가루를 게 위에 듬뿍 뿌렸다.

​'저거… 고춧가루 아닌가?'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붉은색은 한국인에게 '경고'다. 저 정도 양이면 땀구멍이 열리고 혀가 마비될 게 뻔했다.

동시에 묘한 거부감이 들었다. 미국 놈들은 요리를 너무 쉽게 한다. 늙은 호박을 긁는 대신 캔을 따서 붓고, 토마토를 으깨는 대신 병조림 소스를 들이붓는다. 그들에게 요리는 '정성'이 아니라 '조립'인 걸까. 갓 쪄낸 신선한 게 위에 공장에서 나온 인스턴트 가루를 덮어버리는 저 행위가 내 눈엔 일종의 반칙처럼 보였다.

​"먹어봐. 끝내줘."

​잭의 권유에 나는 쭈뼛거리며 붉은 가루가 잔뜩 묻은 집게발을 집어 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 매운맛이 훅 치고 들어오겠지.

​와작.

​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맵지 않다. 전혀.

혀에 닿는 순간 느껴지는 건 짭조름한 소금기, 그리고 뒤이어 올라오는 묘한 감칠맛이었다. 훈연된 파프리카 향이 코를 스치고, 셀러리의 쌉싸름함이 침샘을 자극했다. 이건… 어디서 먹어본 맛인데.

​입맛을 다시던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다시다. 아니면 라면 스프.

​이 붉은 가루의 정체는 미국판 '마법의 가루'였다.

우리가 밍밍한 국물에 라면 스프를 넣어 심폐소생술을 하듯, 이들도 밋밋한 게살에 이 가루를 뿌려 맛을 완성하고 있었다.

​색깔에 속았다. 붉다고 다 매운 건 아니었다.

그리고 편견에도 속았다. 깡통에서 나왔다고 다 가벼운 맛은 아니었다.

마치 부대찌개 같다. 미군 부대에서 나온 밍밍한 깡통 콩과 햄이 한국의 김치를 만나 진득한 요리가 되듯, 이 미국산 가루도 뜨거운 게살과 섞이니 입안에서 묘한 설득력을 가졌다.

​나는 잭이 보지 않는 틈을 타, 게딱지에 그 가루를 조금 더 털어 넣었다.

이질적인데 자꾸 당기는 맛.

역시, 사람이나 음식이나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 까보고, 섞어봐야 안다.

​[작가의 말]

​'Old Bay(올드 베이)'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시작된 이 믹스 시즈닝은 그들에게 일종의 '소울 푸드'이자 만능 치트키입니다. 1940년대에 개발되어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으니, 그 역사만큼은 우리의 고추장만큼이나 깊죠.

​처음엔 붉은 색감 때문에 한국의 매운맛을 상상했지만, 막상 맛보면 전혀 맵지 않고 짭짤하면서도 복합적인 허브 향이 납니다. 한국인이 여행 갈 때 고추장을 챙기듯, 메릴랜드 사람들은 여행 갈 때 이 깡통을 챙긴다고 하더군요.

​한국의 게국지가 묵은지와 국물로 세월을 끓여내는 맛이라면, 미국의 올드 베이는 여러 가지 마른 향신료를 배합해 재료 본연의 맛을 직관적으로 끌어올리는 맛입니다. 방식은 달라도 '바다의 맛'을 즐기는 마음은 통하는 것 같습니다. 혹시 미국 여행 중 마트에서 노란 깡통에 빨간 뚜껑을 본다면, 겁먹지 말고 한번 집어보시길. 의외로 우리 입맛에 착 감기는 '미국판 다시다'를 경험하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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