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홍매화 아래, 남겨진 것들

감장아찌

by 마루

​[단편] 홍매화 아래, 남겨진 것들

​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례의 공기는 이미 충분히 젖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물기가 옷깃이 아니라 기억의 안감을 적시는 그런 봄날이었다.

화엄사로 오르는 길, 흙은 부드럽게 발바닥을 삼켰고 바람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등을 떠밀었다.

​그 길의 끝에 홍매화가 있었다.

붉다는 형용사로는 모자랐다.

그것은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깊은 속 어디에선가 울컥 울컥 배어 나온 선혈처럼 보였다. 나는 카메라를 들지 못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이 지독하게 아름다운 출혈이 멈춰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나무 아래의 현실은 꽃보다 훨씬 소란스러웠다.

‘생생정보통’이라 적힌 노란 로고가 붙은 카메라가 홍매화의 고즈넉한 붉은색 위로 이질적인 백색 조명을 쏘아대고 있었다.

​“자, 스님! 이번엔 조금 더 간절한 표정으로 붓을 들어주세요!”

​방송용 '시험'이 시작되었다.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은 카메라 감독의 지시에 따라 어색하게 웃다 결국 붓을 내려놓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이거 어린 스님들이 보면 안 되는데! 수행하는 사람들이 이러고 있는 거 보면 큰일 나!”

​스님은 펄쩍 뛰며 카메라 밖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렌즈는 그 당혹감마저 '현장감'이라는 이름으로 집요하게 쫓았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입안이 써졌다.

수행의 정적 대신 시청률과 홍보의 소음이 들어찬 자리. 한 장에 만 원씩 팔려 나가는 색종이 소원지들이 꽃잎보다 많아져 비린내를 풍겼다. 상업화라는 거대한 파도가 절 마당을 휩쓸고 지나가는 동안, 꽃은 그저 비싼 소품이 되어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섰다. 그때, 한 소녀를 보았다.

​아무것도 손에 쥐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꺾어 나무를 보고 있는 아이. 아이는 예전에도 이곳에 왔었다. 굽은 등을 가진 노인의 손을 잡고, 바람이 덜 닿는 산신각 뒤편에 서서 아주 삐뚤한 글씨로 소원을 적던 아이.

​‘다시 오게 해주세요.’

​그것이 아이의 처음이자 마지막 문장이었다.

​절을 내려오던 길, 노인은 아이에게 물었다. “

밥, 뭐 해줄까.” 아이는 대답했다. “아무거나요.” 그건 세상에서 가장 까다로운 주문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노인은 단단한 생의 기운을 머금은 감을 꺼냈다. 칼날이 살점을 파고들 때마다 ‘툭, 툭’ 하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노인은 손의 감각으로만 적당한 두께를 재어 썰어냈다. 너무 얇으면 존재가 사라지고, 너무 두꺼우면 세월이 스며들지 못한다. 고추장의 깊은 향과 시간이 스며드는 속도. 모든 게 말로 설명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그날 밤, 풍로가 돌아갔다. 손잡이를 돌려 바람을 불어넣자 죽어가던 숯이 붉게 살아났다.

노인은 옹기에서 감 장아찌를 꺼내 아이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처음엔 단단했던 감이 혀끝에서 홍시처럼 허물어졌다.

짠맛과 단맛이 구분되지 않고 동시에 밀려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세자매 가든’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식당 안으로 시간이 먼저 쏟아져 들어왔다.

검게 그을린 풍로, 벽에 기대어 놓인 낡은 기억들. 무쇠 돌솥의 뚜껑을 열자 치자 빛깔의 노란 밥 위로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 위에 감 장아찌를 올렸다.

한 입. 그 순간, 멈춰있던 풍로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시 절로 올라갔다.

홍매화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하지만 예전의 꽃은 아니었다.

방송 조명 아래 박제된 꽃과 만 원짜리 소원지 사이에서 나는 다시 그 소녀를 보았다.

여전히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나무만 응시하는 아이.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가, 이내 천천히 내려놓았다. 어떤 장면은 남기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영원히 남는다.

​백색 조명에 쫓기던 스님의 당혹스러운 뒷모습과, 나무 아래 멍하니 서 있는 소녀, 그리고 내 입안에 남은 치자밥의 온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는 것일까. 혀끝에 남은 맛일까, 아니면 팔리지 않는 순수한 찰나의 공기일까.

​홍매화 아래로 바람이 한 번 크게 지나갔다.

만 원짜리 종이들이 요란하게 흔들리다

이내 멈췄다. 꽃잎 하나가 소녀의 어깨 위로 떨어졌지만, 아이는 털어내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아주 오래 서 있었다.

젖은 공기가 내 기억의 안감까지 완전히 적실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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