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주의·상상으로 뇌와 몸을 다시 짓는 수련법. 1장
“성격은 안 변한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
뇌 가소성, 심신 상호작용 연구가 말해주는 것
명상·호흡·이미지 트레이닝이 몸과 마음을 바꾼 연구들
‘초능력’이 아니라 ‘훈련 가능한 기술’로 보기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주문을 풀어내기
“어쩔 수 없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말을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화를 참지 못했을 때,
기회를 눈앞에서 또 놓쳤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 말 한마디 못 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말은 이상한 위로처럼 느껴집니다.
“그래, 네 잘못만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그랬는데, 어떡하겠어.”
마치 이미 정해진 대본을 따라가고 있는 배우처럼,
우리는 자신을 고정된 성격의 감옥 안에 가둬두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보려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우리의 성격은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채로 굳어버린 돌덩이일까요?
“얘는 어릴 때부터 숫기 없는 애였어.”
“쟤는 성격이 원래 불 같아. 절대 안 바뀌어.”
가족, 학교, 친구, 직장에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라벨을 받습니다.
과 묶음으로 처리하기 편한 말들.
거기에 MBTI, 혈액형, 별자리, 사주까지 더해지면
우리는 한순간에 “정리 가능한 존재”가 됩니다.
I형이라서, 나는 원래 혼자 있어야 편하고
E형이라서, 나는 늘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고
A형이라서, 소심하고
O형이라서, 대범하고…
라벨은 때로 재미있고,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열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말들이 자기 암시가 되는 순간입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 말은,
현실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미래를 묶어 두는 주문이 되어 버립니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마다,
도전해 보고 싶은 일을 피할 때마다,
우리는 그 주문을 슬며시 꺼내 들며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그래, 난 원래 소심하니까.”
“난 원래 집중력이 없어서.”
“난 원래 그런 거 잘 못해.”
그렇게 몇 년, 몇 십 년이 지나면
처음엔 그저 **“자주 하던 선택”**이었던 것이
어느새 **“내 본성”**과 섞여 버립니다.
사실은,
우리가 “원래 이런 사람”인 경우보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서 익숙해진 사람”인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성격을 “기질”이나 “유전자”라는 언어 대신
**“길”**이라는 이미지로 한번 바꿔 볼까요?
어느 마을에서든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은
자연스럽게 넓어지고 단단해집니다.
비가 와도 쉽게 지워지지 않고,
눈이 와도 먼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
다시 길이 드러납니다.
반대로,
거의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길은
금세 잡초가 자라고,
돌멩이가 뒤엉키고,
어느 순간부터는
“원래 길이 없던 곳”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해 왔는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충돌이 일어나면 무조건 피하는 길
불안이 올라오면 더 생각하지 않는 길
새로운 기회가 오면 “나 같은 사람이 뭘” 하며 돌아서는 길
이런 선택들이 반복될수록
우리 안의 길은 한 방향으로만 넓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봐, 난 늘 이렇게 행동해.
이게 바로 나야.”
하지만 그건
“이 길을 가장 많이 걸어왔던 나”이지,
“이 길만이 가능한 나”는 아닙니다.
조금 과장해 말해 보겠습니다.
“성격이란,
우리가 평생 동안 가장 많이 밟아 온
심리적 발자국들의 합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뀝니다.
“나는 지금도
같은 길만 밟고 있는가?”
“새로운 길 하나쯤은
내 안에 더 만들 수 없는가?”
누군가 변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삶에 큰 사건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큰 사랑, 큰 실패, 큰 병, 큰 깨달음.
물론 그런 순간들이
인생의 방향을 크게 틀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매일 경험하는 변화는
훨씬 더 소소한 것들입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10초 동안만 입을 다물고 숨을 세는 사람,
늘 거절하던 초대를
한 번만 “그래, 가 볼게”라고 말해 보는 사람,
잠들기 전에 휴대폰 대신
오늘 하루 고마웠던 일을
단 한 가지라도 떠올려 보는 사람.
이런 선택들은
한 번으로는 티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반복되면
뇌는 그 선택을
하나의 새로운 길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당신에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아주 작지만
평소와는 다른 선택을
단 한 번만 해 볼 수 있을까요?”
그 작은 차이가
당신의 뇌와 몸, 기억과 감정 위에
새로운 설계선을 긋는 첫 번째 연필선이 됩니다.
“나는 원래 소심해요.”
“나는 원래 쉽게 무너져요.”
“나는 원래 몸이 약해요.”
이 문장들 끝에,
단어 하나를 조용히 덧붙여 봅시다.
“나는 지금까지는 소심했어요. 아직은.”
“나는 지금까지는 쉽게 무너졌어요. 아직은.”
“나는 지금까지는 몸이 약했어요. 아직은.”
_원래_라는 말은
문장을 닫아 버립니다.
_아직_이라는 말은
문장을 열어 둡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당신의 성격을 부정하거나
지금까지의 삶을 잘못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성격 역시
조금씩 다시 설계될 수 있는
살아 있는 구조물이다.”
라는 사실을
부드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당신의 마음 안에 놓아 보는 일입니다.
이후의 장들에서 우리는
뇌 가소성과 심신 상호작용,
명상과 호흡, 이미지 트레이닝이
실제로 어떻게 이 설계에 참여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은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속으로 한 번만
다른 문장을 중얼거려 보는 데 있습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가 아니라,
“나는 지금도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 조용한 인정이,
보이지 않는 설계도의 첫 페이지입니다.
1-2. 뇌는 생각보다 훨씬 유연하다
보이지 않는 회로를 계속 다시 깎아내리는 손
한때 과학자들은 이렇게 믿었습니다.
“성인은 더 이상 뇌가 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이 지나면 회로는 굳어 버린다.”
그래서 상처 입은 사람에게,
습관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절망한 사람에게
우리는 너무 쉽게 이런 말을 건넸습니다.
“원래 그런 거야. 나이가 들면 다 그래.”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뇌과학은 이 말을 조용히 취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사고를 겪은 사람이
다른 쪽 뇌로 기능을 조금씩 옮겨 가는 모습을 보았고,
오랫동안 손마디조차 움직이기 힘들던 사람이
재활 훈련 끝에 다시 걸음을 떼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평생 화를 참지 못하던 사람이
수년간의 수련 끝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기록했습니다.
그 모든 증거들이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뇌는 살아 있는 동안,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시 설계한다.”
완전히 새로운 뇌로 갈아끼우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선로를 바꾸고, 우회를 만들고,
막힌 길 옆에 작은 샛길을 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뇌를 어려운 기관이 아니라
하나의 숲으로 상상해 보면 이해가 더 쉬워집니다.
숲 속에는 수많은 길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걷는 길은
자연스럽게 넓어지고, 흙이 단단해지고,
비가 와도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거의 아무도 밟지 않는 길은
금세 풀이 무성해지고,
나뭇가지가 엉켜 길이 사라집니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 행동도 비슷합니다.
“나를 비난하는 생각”이라는 길,
“무조건 도망가는 반응”이라는 길,
“참고 넘기는 습관”이라는 길,
“한 번 더 시도해 보는 선택”이라는 길.
우리가 자주 쓰는 길은
점점 더 걷기 쉬워지고,
잘 쓰지 않는 길은
조금씩 희미해집니다.
뇌과학에서 말하는 가소성은
이 숲의 법칙과 비슷합니다.
두 신경세포가 자주 함께 활동하면
그 사이의 연결은 더 굵어지고,
거의 함께 일하지 않으면
그 연결은 얇아지고 끊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반복하고,
어떤 감정을 자주 되새기고,
어떤 행동 패턴을 계속 선택하느냐에 따라
뇌 속의 “길 지도”는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다시 그려집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라는 말 뒤에는
사실 “나는 그 길만 가장 많이 걸어왔어.”라는
숨겨진 문장이 붙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입니다.
조금 다른 길을,
조금 더 자주 걸어 보는 것.
우리는 이미, 심신 상호작용을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불안하면 심장이 빨리 뛰고, 손에 땀이 납니다.
큰 수치심을 느끼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릅니다.
오랫동안 슬픔을 품고 살면
어깨가 굽고, 숨이 얕아집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심장 박동, 호흡, 근육의 긴장이지만,
그 시작점은 대개 보이지 않는 생각과 감정입니다.
반대로,
몸에서 마음으로 올라오는 길도 있습니다.
깊고 느린 숨을 몇 번 반복하면
이유 없이 조금 차분해지는 순간들,
자세를 곧게 펴고 걸어 다니기 시작했더니
자신감이 아주 조금씩 달라지는 경험,
가볍게라도 몸을 움직이고 나면
생각이 덜 꼬이는 오후.
이 두 방향의 길,
즉 마음 → 몸, 몸 → 마음의 길이
서로 끊임없이 신호를 주고받는 상태를
우리는 심신 상호작용이라고 부릅니다.
호흡, 주의, 상상은
이 길목들에 놓인 세 개의 스위치와 같습니다.
호흡은
자율신경계에 직접 손을 대는 스위치,
주의는
“어느 회로에 전기를 더 줄 것인지”를 고르는 스위치,
상상은
뇌가 실제 경험처럼 받아들이기도 하는
가상 현실 스위치입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를
조금 더 의도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내 안에서
마음과 몸이 오가는 길에
직접 신호를 보내기 시작하겠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어쩌면 너무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래, 뇌가 변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내 삶과 무슨 상관이야?”
그래서 이 책은
이 가소성의 개념을
호흡·주의·상상이라는 구체적인 행위에
하나씩 연결해 보려 합니다.
숨을 바꾸면,
내 안의 자율신경 회로를
어떻게 다르게 설계할 수 있는지,
주의를 다시 훈련하면,
뇌가 무엇을 “중요한 정보”로 분류할지
어떻게 달라지는지,
상상의 내용을 바꾸면,
몸과 감정이 어떤 새로운 반응을 연습하게 되는지.
이 장의 목적은
당장 눈부신 변화를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조용히 이렇게 느끼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아, 내 안에는
여전히 손댈 수 있는 설계도가 남아 있구나.”
그래서
“성격은 안 변해”라는 오래된 주문 대신,
당신 마음 한구석에
새로운 문장이 하나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뇌는 살아 있는 동안
조금씩 다시 배울 수 있다.”
이 문장이
호흡과 주의, 상상을 다룰
다음 장들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열쇠가 되어 줄 것입니다.
실험실과 병실, 그리고 조용한 명상방에서 일어난 작은 기적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마음이 몸을 움직이고, 몸이 마음을 끌고 다닌다는 사실을.
하지만 “알고 있다”는 말은 대개 이런 뜻이기도 합니다.
“알긴 아는데, 믿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이론보다 장면을 먼저 꺼내 보려 합니다.
연구실과 병실, 명상센터와 일상의 한가운데서
숨과 시선, 상상이 실제로 몸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그 순간들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한때 늘 분노에 시달리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별것 아닌 말에도 쉽게 폭발했고,
폭발한 뒤에는 누구보다 깊게 후회하는 사람.
의사는 그에게 약을 처방했고,
그는 꾸준히 복용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담당 의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은 불길을 어느 정도 눌러 줄 수 있지만,
장작을 다시 쌓는 법까지 알려주지는 못해요.
같이 연습해 볼까요?”
그가 시작한 것은 화려한 영적 수행이 아니라,
매일 15분씩의 기초 명상이었습니다.
의자에 바르게 앉기
눈을 감고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감각만 바라보기
생각이 흘러가면, 다시 숨으로 돌아오기
처음 몇 주 동안은
아무 변화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그저 지루한 시간의 반복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늘처럼 화를 낼 상황이 찾아왔을 때
아주 낯선 일이 벌어졌습니다.
폭발하기 직전,
삶이 슬로모션이 된 것처럼
짧은 간격이 느껴진 것입니다.
욕설이 튀어나오기 직전의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고 손이 덜덜 떨리기 직전의 순간,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실 하나를 붙잡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생소한 선택을 했습니다.
“잠깐만, 나 지금 너무 예민한 것 같아서
5분만 있다가 이야기해도 될까요?”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 할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이루어진 뇌 촬영에서
연구자들은
감정 폭발과 관련된 영역과,
이를 조절해 주는 영역 사이의
연결 패턴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명상이 그를 “성스러운 성인”으로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반응과 반응 사이에
숨 쉴 수 있는 틈을 만들었습니다.
그 틈이 바로,
뇌가 새 회로를 깔기 시작한 자리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 A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공황 발작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지하철, 엘리베이터, 버스 안.
어느 날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숨이 막히고,
“지금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 자리는 순식간에 탈출해야 하는 감옥이 되었습니다.
그는 약을 복용했고, 상담도 받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치료자는
특별한 숙제를 하나 내주었습니다.
“발작이 오기 전에,
몸이 보내는 ‘전조 신호’를
아주 자세히 기록해 보세요.”
며칠간의 기록 끝에
그는 어떤 패턴을 발견합니다.
아주 미세한 답답함
목 주변을 조이는 느낌
머릿속에서 “또 시작이다”라는 생각이 번쩍이는 순간
치료자는 그때 사용할 간단한 호흡법을 알려줍니다.
4초 동안 코로 천천히 들이마신다.
1~2초 간 숨을 살짝 머문다.
6초 이상 길게 내쉰다.
이 리듬을 3분 동안 유지한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 호흡은 ‘발작을 막는 주문’이 아니라,
몸에게 다시 알려주는 신호예요.
‘지금 위험이 아니라, 오해일지도 몰라’ 하고.”
몇 주 후,
A는 지하철 안에서
발작의 그림자를 다시 만납니다.
목이 조이는 느낌.
심장이 빨라지려는 움직임.
“또 시작이야”라는 생각.
이전 같으면
그는 뛰쳐나가듯 문을 향해 달려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그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천천히 4–1–6 호흡을 시작했습니다.
처음 30초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1분, 2분이 지나면서
심장의 박동이 아주 조금씩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공황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그날 그는
지하철에서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그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습니다.
“호흡이 나를 구했다기보다,
호흡을 기억해낸 내가 나를 구했다.”
자율신경의 거친 파도가
호흡이라는 작은 노를 통해
조금은 다르게 타지기 시작한 순간.
뇌와 몸의 설계도에는
아주 가느다란 새로운 선이 그어졌습니다.
상상은 종종
“현실 도피”로 오해받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상상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복귀를 위한 연습실이 됩니다.
뇌졸중 이후,
오른팔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게 된 B는
물리치료와 더불어
이상한 훈련 하나를 권유받습니다.
“팔이 실제로 움직이지 않더라도,
움직이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그려보세요.”
B는 처음에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꿈이라도 꾸라는 건가요?”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에
그는 결국 그 연습을 받아들입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이런 장면을 그립니다.
오른팔로 컵을 쥐고,
천천히 들어 올려
입가로 가져가 마시는 장면.
처음 며칠은
그저 희미한 그림자 같았습니다.
팔이 아니라, 그림자를 움직이는 기분.
하지만 반복할수록
상상 속 팔의 무게, 컵의 차가움,
입술에 닿는 감각이
조금씩 더 선명해졌습니다.
몇 주 후,
실제 재활치료를 하던 물리치료사는
아주 작은 변화를 발견합니다.
“오늘은,
지난주보다 팔이 더 가볍게 들리네요.”
나중에 이루어진 검사에서
연구자들은
“실제 움직임”과 “생생한 상상”이
뇌에서 놀랄 만큼 비슷한 영역을 자극한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합니다.
몸은,
완전히 속지는 않지만,
상상을 **“연습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상상이란,
없는 것을 꾸며내는 거짓말이 아니라,
뇌에게 보내는
“이 방향으로 길을 내보자”는
예행 연습일지 모릅니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일어났습니다.
조용한 명상방에서,
불안한 지하철 안에서,
재활 병동의 침대 위에서.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참여했다는 것
단지 “생각을 바꾸자”도 아니고,
단지 “몸만 단련하자”도 아니었습니다.
숨, 심장 박동, 근육의 긴장과 이완이
마음의 방향과 함께 묶여 있었습니다.
반복이 회로를 만들었다는 것
명상 15분,
3분 호흡,
매일 반복한 상상 연습.
어느 것도 한 번에 인생을 뒤집지 않았지만,
그 작은 반복들이
뇌의 설계도를 조금씩 수정해 갔습니다.
의미가 붙어 있었다는 것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이 연습을 한다”,
“지금 이 호흡은 나를 도망이 아니라 선택으로 데려간다”,
“이 상상은 잃어버린 움직임을 되찾기 위한 리허설이다.”
이런 의미 부여가
단순한 기술을
삶의 기술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이런 변화를 보고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기적은 훈련이라는 이름의 씨앗에서 자라납니다.
숨을 다시 배우고,
주의를 다시 훈련하고,
상상을 다시 선택하는 일.
이 세 가지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뇌와 몸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른 이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이 책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설계도란,
별것 아닌 이 작은 순간들의 누적입니다.
화를 내기 직전,
공황의 파도 위에서,
움직이지 않던 팔을 다시 들어 올리는 그 찰나에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아, 내 안에서
이미 다른 길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구나.”
신비의 옷을 벗겨야 비로소 손에 잡힌다
우리는 특별한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영재”, “초능력자”, “선천적인 재능” 같은 말을 들으며 자라났습니다.
초등학생 때 이미 대학 수학을 풀어낸 아이,
한 번 본 장면을 그대로 그려내는 화가,
한 번 들은 곡을 즉시 연주하는 음악가.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말합니다.
“저건 타고난 거야.”
“저건 우리가 흉내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이 말 속에는
경외와 동시에, 아주 교묘한 포기가 숨어 있습니다.
“저건 저 사람 이야기고,
나와는 상관없어.”
그 순간,
우리는 자기 안의 가능성을
조용히 접어 서랍 속에 넣습니다.
숨을 다루는 능력,
주의를 모으는 능력,
상상을 선명하게 부리는 능력 역시
종종 이와 비슷한 취급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원래 집중력이 남다른 사람이야.”
“그 사람은 영성이 있어서 그래.”
“그 사람은 기가 세서, 손만 대면 낫는다더라.”
그렇게 호흡·주의·상상의 힘은
특별한 소수에게만 허락된
신비롭고 먼 이야기로 밀려나 버립니다.
그러나 이 책이 하려는 일은
바로 그 신비의 옷을 벗겨내는 것입니다.
“이건 초능력이 아니라,
누구나 조금씩은 연습할 수 있는 기술입니다.”
라고,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술이라고 부를 때,
그 말 안에는 몇 가지 전제가 들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툴 수 있다.
연습하면 조금씩 나아진다.
누구나 자기 수준에서 배울 수 있다.
피아노를 떠올려 봅시다.
처음에는 양손을 동시에 움직이는 것조차 벅찹니다.
악보를 보는 눈,
손가락이 가는 길,
페달을 밟는 타이밍이 따로 놀죠.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원래 피아노에 재능이 없으니
건반을 만지지 말아야지.”
대신 이렇게 생각합니다.
“연습하면 나아지겠지.”
그리고 실제로,
매일 쳐다보고, 만지고,
틀리고 또 틀리다가
어느 순간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노래를 기억하는 지점이 찾아옵니다.
수영도 같습니다.
물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몸이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숨을 들이마시는 타이밍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물과 맞지 않는 타고난 인간”이라고
평생 선언해 버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술은
연습과 지도, 반복과 수정을 통해
조금씩 몸에 배어 간다는 것을.
호흡·주의·상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숨을 어디까지 들이마실지,
어느 속도로 내쉴지,
어떤 장면에 주의를 오래 머물게 할지,
어떤 문장을 마음속에서 반복할지.
이 모든 것은
처음에는 낯설고 서툴지만,
조금씩 연습하면
나름의 리듬과 감각이 생깁니다.
우리가 이 능력을
“영적 재능”이 아니라 “내면 기술”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것은 갑자기
훈련의 대상이 됩니다.
“나는 지금 이 기술을
내 수준에서, 내 속도로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전환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변화를 이야기할 때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았대.”
“그녀는 어느 순간 병이 싹 나았대.”
“그 사람은 수련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눈을 떴대.”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서는
신비롭고 매혹적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 밖에 서 있는 사람에게
그 말은 이렇게 들리기도 합니다.
“나는 그런 ‘어느 날 갑자기’를
기다릴 준비밖에 할 수 없구나.”
그래서 이 책은,
그 이야기의 문장을 살짝 바꾸고 싶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호흡과 명상을 연습하다가
어느 날 티가 날 만큼 달라졌대.”
“그녀는 수년간 집중과 상상 훈련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몸이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대.”
기적처럼 보이는 순간 뒤에는
대개 말해지지 않은 훈련의 시간이 숨어 있습니다.
그 시간을 이야기에서 지워 버리면,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제,
이 언어를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적은,
나와 내 안의 회로가
수없이 연습한 끝에
어느 날 눈에 띄기 시작한 변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하루아침의 각성을 기다리지 않고,
조용히 이렇게 결심하게 됩니다.
“나는 오늘도,
내 안의 설계도를
조금씩 다시 그려 나가는 훈련을 하겠다.”
어떤 수련이든,
가장 견디기 힘든 시기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은 기간”**입니다.
호흡을 바꾸고 있는데도
여전히 불안이 올라오는 날,
명상을 매일 앉아 하는데도
여전히 짜증과 분노가 금세 솟구치는 날,
상상 연습을 계속 하지만
몸이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은 날.
우리는 그때마다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소용없는 짓 아닌가?”
“역시 나는 안 되는구나.”
하지만 뇌와 몸의 설계도는
대부분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먼저 바뀝니다.
아직 완전히 다른 행동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반응하기 전에
“잠깐 멈추고 싶다”는 감각이 아주 순간적으로 스칩니다.
여전히 불안하긴 하지만,
예전만큼 오래 끌고 가지 않고
조금 빨리 잦아듭니다.
통증이나 피로는 여전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숨을 기억해 내는 나가
아주 조금씩 늘어납니다.
이 단계의 변화는
남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바로 그 미세한 차이를 **“훈련의 성과”**로 인정해 주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숨을 한 번 더 기억해 냈다.”
바로 이 문장이
보이지 않는 설계도를 그리는 사람의 언어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해도 좋습니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러나 매일 연습 중인 내면 기술자입니다.”
초능력자가 아니라,
훈련자.
마법사가 아니라,
호흡과 주의, 상상을
조금씩 다뤄 가는 수련자.
이 책의 다음 장들에서
우리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하나씩 펼쳐 놓을 것입니다.
어떤 숨이
내 신경계를 다시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어떤 주의 훈련이
내 감정과 생각의 길을 조금씩 바꾸어 가는지,
어떤 상상이
몸과 뇌에 새로운 움직임을 연습시키는지.
그 모든 내용을 관통하는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이건, 기적이 아니라
내가 오늘 당장
조금이라도 연습해 볼 수 있는 기술인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할 수 있을 때,
당신의 내면 설계도는
이미 새 페이지를 펼치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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