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반려동물과 영적으로 소통하는 법.1장
– 그리움이 영적 소통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
반려동물이 떠난 후에도 발소리, 기척, 습관을 느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짧은 에피소드 모음.
“영적 소통”의 문이 열리는 초기 경험들을 보여줌.
처음으로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건,
장례식이 끝나고 사흘째 되던 밤이었다.
집 안은 어색할 만큼 조용했다.
늘 누군가의 숨소리, 꼬리치는 소리,
바닥을 긁는 발톱 소리가 섞여 있던 공간인데
이제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와
벽시계 초침 소리만 공기를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소파 끝에 몸을 말고 앉아 있었다.
잘 접어둔 목줄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보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시선을 돌렸지만
눈동자는 자꾸만 그곳을 찾아갔다.
그때였다.
거실 한쪽, 복도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탁, 탁, 탁—
마치 손가락으로 나무 바닥을 세 번 두드린 것처럼,
그러나 그녀의 귀는
그 음을 아주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발톱 소리다.
그 강아지가, 밥 시간이 되었을 때
복도 끝에서부터 뛰어오던 속도와
거의 똑같았다.
그녀는 숨을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
두 번째 소리는 나지 않았다.
집 안은 다시, 처음부터 조용했던 것처럼 돌아갔다.
잠시 후에야,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또 시작이네… 나도 결국 환청을 듣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눈에서는
그렇게 많이 울었던 장례식 때와는
조금 다른 눈물이 흘렀다.
이번 눈물은,
슬픔만이 아니라
조금은 안도에 가까웠다.
그래, 너 없이 사는 첫 번째 밤이
이렇게까지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구나.
그녀는 그날 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알았어. 듣고 있어. 또 오면… 괜찮아, 와도 돼.”
다음 이야기는,
열세 살 노견을 떠나보낸 지 일주일 된
또 다른 보호자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
그는 매일 새벽 다섯 시 반이면
강아지에게 밥을 주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복도 저 끝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그의 모닝콜이었다.
또각, 또각, 또각—
한 번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고 현관까지 뛰어와
꼬리를 흔들며 그를 올려다보던 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시간만 되면 그는
잠에서 대충 눈을 떴다.
몇 날 며칠,
몸은 그대로 그 시간에 맞춰 깨어났다.
그리고 어느 새벽,
알람을 끄기 직전
그는 아주 미세한 소리를 들었다.
복도 어딘가에서
‘툭’ 하고 부딪히는 작은 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두세 번의 발자국.
또각, 또각—
그는 숨을 죽였다.
이불 위로 두 손이 살짝 떨렸다.
문을 열어 나가면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방문 손잡이를 잡는 손이
천천히 떨렸다.
예상대로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 길고 좁은 공간의 공기에서
이상할 만큼 익숙한 기운을 맡았다.
산책을 다녀온 날,
씻기고 말려도 사라지지 않던
햇빛과 흙, 바람의 냄새 같은 것.
그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인사했다.
“그래, 일어나라고 했지?
알았어, 오늘도 밥 줄게.
그러니까… 조금만 더 놀다가 가.”
그날 이후,
그는 새벽마다 들려오는 작은 소리를
더 이상 ‘환청’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놓치지 못한 인사”**라고 불렀다.
서로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인사들이
새벽마다 복도를 지나가는 것이라고.
이번엔,
고양이와 살던 한 대학생의 이야기다.
그의 고양이는
세상 어느 곳보다
침대 밑을 사랑했다.
낮에도, 밤에도,
낯선 손님이 오면 더더욱
그곳으로 쏙 들어가
꼬리만 살짝 보이게 눕곤 했다.
병으로 고양이를 보내고 난 뒤,
침대 밑은 비워졌다.
먼지가 천천히 쌓였다.
그는 하염없이 그 틈을 바라보다가
결국 청소기를 들이밀었다.
“이제 여기도, 현실로 돌려놔야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밤이 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다.
어느 날 밤,
그는 책을 읽다가
습관처럼 옆으로 돌아누웠다.
그 순간,
침대 한쪽이 아주 약간
툭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누군가가 조심스레 올라타고
몸을 말고 눕는 것처럼.
그는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잠깐 눈을 크게 떴다.
방 안에는 그 혼자였다.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무서움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가슴에 올라왔다.
몇 초 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 네 자리 맞지.
침대 밑에서 올라와 봤구나.
그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말하고 나서야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침대가 살짝 내려앉을 때마다
공포 대신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거기 있구나.
나도 여기 있어.”
침대는 여전히 같은 나무 침대였고,
무게도 변하지 않았고,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그저 스프링이 삐걱거린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느낌이 분명하게
한 존재의 “몸짓”처럼 다가왔다.
세상에 없는 몸이
여전히
그의 침대 가장자리를 눌러주는 것처럼.
마지막 이야기는,
은퇴한 뒤 혼자 사는
한 남자의 집 앞에서 시작된다.
그의 강아지는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그보다 늦게 현관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문 열리는 소리만 나면
부엌에서, 방에서, 마당에서
어디에 있든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달려나와
신발장 앞에 서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늦었어요. 어디 갔다 이제 와요.”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가 강아지를 떠나보낸 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길었다.
현관까지 이어진 골목길이
낯선 나라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문을 열기 직전,
그는 아무도 없는 집 안을 떠올렸다.
현관 앞에
아무도 서 있지 않을 것을 생각하니
문손잡이를 돌리는 손이 멈췄다.
그래도 언젠가는
들어가야 했다.
철컥—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아주 약한 바람을 느꼈다.
안에서 밖으로
누군가 한 번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기척.
그리고
발밑에서 아주 희미한 냄새가 올라왔다.
흙냄새, 햇빛냄새,
여름날 뜨거운 시멘트를 밟고 돌아오던
발바닥의 냄새.
현관에는
그가 아침에 정리해둔 그대로
신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강아지의 리드줄은
벽에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닳은 발자국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남자는 문간에서 한동안
신발장 옆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평생 매일 저녁마다
강아지가 차지하던 그 자리.
그는 마치
그 자리에 누군가가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다녀왔어.
오늘은… 네가 먼저 나왔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얼음 같은 것이
조금 녹아내리는 느낌만이
천천히 번져갔다.
그날 밤,
그는 오래간만에
불을 끄고 누워서도
현관을 생각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도시,
서로 다른 계절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다.
첫째,
그 소리와 기척은
언제나 전처럼 반복되던 습관의 자리에서 들려온다.
새벽의 복도,
잠들기 직전의 침대,
퇴근 후의 현관.
둘째,
처음에는 모두가
“내가 이상해진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지만,
잠시 후에는
이상하게도 공포보다 안도가 더 크다.
셋째,
그들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말을 건다.
“와도 돼.”
“거기 있구나.”
“다녀왔어.”
아무도 듣지 못할 것 같은 인사들.
그러나 어쩌면
그 인사를 가장 절실히 듣고 싶었던 건
떠난 존재가 아니라,
남겨진 그들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소리와 기척은
어쩌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는 아직 혼자가 아니다.”
어느 날,
우리는 이 조용한 경험들을
단지 ‘환청’이라 부르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 보기로 한다.
그 이름은
“영적 소통”일 수도 있고,
“마음의 잔향”일 수도 있다.
이 책에서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불러 보기로 한다.
마지막 날 이후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인사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말한다.
그 인사들이야말로,
무지개 다리 너머에서 건너온
_아주 처음의 노크 소리_였다고.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 노크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반려동물이 떠나고 나면,
우리는 먼저 사진을 본다.
장난감, 옷, 목줄을 정리한다.
하지만 가장 먼저
우리를 붙잡는 건
사진도, 물건도 아니다.
습관이다.
몸이 먼저 기억해내는 자리들.
손이 저절로 향하는 공간들.
아직도 두 개의 그릇을 떠올리는 아침,
무릎이 먼저 일어나는 산책 시간,
누구도 앉지 않는 소파 한 칸.
어쩌면 영적 소통은
이 빈자리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침마다
싱크대 앞에 서면
먼저 오른쪽 아래 칸을 본다.
거기엔 이제
아무것도 없다.
예전에는
스테인리스 작은 그릇 두 개가
나란히 엎어져 있었다.
한 그릇에는 사료,
한 그릇에는 물.
매일 아침 7시쯤,
눈곱을 떼기도 전에 부엌으로 나가면
이미 그 아이는
그릇 자리 앞에 앉아 있었다.
꼬리를 살짝 두 번 흔들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알잖아요, 지금 그 시간이잖아요.”
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그 아이를 떠나보낸 뒤,
그녀는 그릇을 깨끗이 씻어
상자 속 깊은 곳에 넣었다.
부엌은 더 넓어졌고,
바닥은 더 깨끗해졌다.
그런데도
손은 여전히
아침이 되면
두 개의 그릇을 찾는다.
우유팩을 들고 있던 손이
한 번 허공을 더듬는다.
사료 봉지의 방향으로
무의식적으로 뻗어 나갔다가,
허공 한가운데서 멈춘다.
그때마다
부엌 바닥 한쪽에
햇살이 작은 원을 그리며 떨어진다.
마치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앉은 것처럼.
“오늘도 잊지 않았네, 그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건 단지
습관의 관성이라고만 하기에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그 아이가 떠난 뒤에도
아침이라는 시간이 먼저 그녀를 데려와
“여기, 오늘도 둘이 먹던 자리야”
하고 조용히 알려주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그녀는 빈 바닥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숟가락을 하나 더 꺼냈다.
그릇은 없지만,
숟가락은 두 개.
“오늘도 같이 먹자.
넌 기억 속에서,
나는 지금 여기서.”
그날의 아침은
이상하게
덜 쓸쓸했다.
그는 평생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 후에 반려견을 만났다.
매일 오후 네 시,
핸드폰 알람이 울리기 조금 전에
강아지는 먼저 안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알람 필요 없죠?
제가 있으니까요.”
그런 얼굴로.
목줄을 들면
네 발이 동시에 바닥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골목으로 나갈 때까지
행복이라는 단어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병원 냄새를 끝으로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핸드폰에서 알람을 껐다.
알람 소리가
괜히 제 시간에 울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현관 앞이 더 비어 보일 것 같아서.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후 네 시가 되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TV를 보다가도
의자가 살짝 뒤로 밀리고,
무릎이 저절로 일어나고,
시선이 현관을 향했다.
“아차, 이제 안 나가도 되지…”
그는 그때마다
다시 몸을 소파에 묻었다.
하지만 가슴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가만히 말하는 듯했다.
그래도 나가 볼래요?
며칠 뒤,
그는 조심스럽게
목줄이 걸려 있던 벽을 바라보았다.
텅 빈 못 두 개.
그 밑에는
예전 강아지의 발자국이
눈에 보이지 않게
겹겹이 쌓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결국
그 시간에 집을 나섰다.
현관을 지나
골목을 돌아
늘 산책하던 길을 향해 걸어갔다.
신기하게도
발걸음마다
강아지가 한 번씩
옆에서 고개를 드는 기분이 들었다.
냄새를 맡던 자리,
멈춰 서서 사람을 구경하던 자리,
풀숲을 들여다보던 자리에 이르면
그는 한 번씩
멈춰 서게 되었다.
“여기 좋아했지.
여기서 맨날 안 가려고 버텼잖아.”
그는 중얼중얼 말을 걸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대화는 계속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골목 어귀에서
다른 보호자와 강아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기 두 개의 그림자에,
한때 우리도 섞여 있었지.”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프면서
동시에 따뜻해졌다.
오후 네 시는 여전히
그와 강아지의 산책 시간이었다.
비록
이제는 혼자 걷는 산책이지만,
몸이 먼저 기억해내는 그 시간 속에서
그는 매일
보이지 않는 한 존재와 다시 걷고 있었다.
노부부의 집엔
오래된 소파가 있었다.
쿠션이 조금 눌려 있고,
가죽은 군데군데 색이 옅어져 있었지만
버리자니 아까운,
세월이 잘 배어 있는 소파였다.
그 소파의 오른쪽 끝,
창가 쪽 자리는
오랫동안 한 아이의 자리였다.
낮에는 햇살을 쬐며 낮잠을 자고,
저녁에는 TV 소리를 들으며 턱을 걸치고,
밤에는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배경음처럼 듣던 자리.
강아지가 떠난 후,
부부는 처음 몇 날 며칠을
왼쪽 끝에만 앉았다.
누군가 말한 것도 아닌데
둘 다,
자연스럽게
오른쪽 끝을 비워 두었다.
“앉을까?”
“그래, 이제는 앉아도 되겠지?”
여러 번 말이 오갔지만
결국
누구도 앉지 않았다.
그 자리에 앉는 순간
정말로
그 아이가 사라진 것 같을까봐.
어느 저녁,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남편이 늦게 들어왔다.
우산을 털고,
젖은 코트를 벗고,
거실로 들어왔을 때
아내는 왼쪽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오른쪽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쪽 자리를 보는 순간
그는 ‘빈자리’ 대신
**‘차지되어 있는 자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이미 거기에 앉아 있는 것처럼.
햇빛도 없고,
강아지도 없고,
이불도 없는 자리.
그런데도
왠지 그 자리에서만
공기가 더 조용하고
소파의 쿠션이
조금 더 부드러워 보였다.
“오늘도 그 자리는 예약석이네.”
그가 농담처럼 말하자
아내가 책에서 눈을 들었다.
“응, 괜히 앉기 싫어.
앉으면… 그 애가 진짜 떠난 것 같잖아.”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대신 TV에서
느릿한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이 흘렀다.
그때
창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커튼이 살짝 흔들리고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소파 위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번졌다.
흔들리는 빛이
오른쪽 자리 위에서
조용히 모양을 만들었다.
꼬리를 말아 몸에 붙이고
서서히 숨을 고르며
잠들기 직전의 강아지처럼.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 같은 이미지를 떠올렸다.
아, 또 와 있었구나.
비가 조금씩 잦아들 때까지
그 자리는
그렇게 세 사람의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날 밤,
부부는 처음으로
조금 용기를 내어
오른쪽 끝에 담요를 하나 깔았다.
“겨울되면 차갑잖아.
거기… 앉을 애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그 말에
둘은 동시에 웃었다.
살아 있는 몸은 없지만,
두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그 소파 한 칸이
여전히 한 존재의 자리로 남아 있었다.
밥그릇의 자리,
산책 시간,
소파 한 칸.
그 자리는 이제
누구에게도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먼저 우리를 기억해낸다.
아침이 되면 손을 불러들이고,
오후가 되면 몸을 일으켜 세우고,
밤이 되면 누군가 앉아 있는 것 같은
기척을 만든다.
우리는 종종
이것을 “습관”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한다.
“내 몸이 그냥 그 시간을 기억해서 그래.”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말만으로는
조금 모자라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 빈자리들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단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같이 먹자.”
“우리 시간이네, 그치?”
“거기, 따뜻해?”
대답은 들리지 않지만
대화는 분명히 존재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처음 열리는
영적 소통의 문인지도 모른다.
아직 형상을 보지는 못했고,
분명한 목소리를 듣지도 못했지만,
자리를 통해, 시간 속 습관을 통해
우리는 이미
무지개 다리 너머의 누군가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 순간부터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빈자리들이
조금 더 분명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우연”이라고 부르기엔 아쉬운 장면들,
“착각”이라고 넘기기엔
너무 정확한 타이밍들.
어떤 이들은
그 장면들 앞에서
마침내 이렇게 속삭인다.
“혹시… 네가 나를 부른 거니?”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보이지 않는 문이
조용히 한 번 더 열리기 시작한다.
어느 순간부터
소리와 빈자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생겨난다.
“그냥 우연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상한데…”
마음 한구석에서
이 말이 슬며시 고개를 들 때,
문 하나가 아주 살짝,
안쪽에서부터 열리기 시작한다.
아직은 믿을 수 없어서,
그저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혹시… 네가 맞니?”
그는 장례식이 끝난 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다가 그대로 멈춰 섰다.
현관이 너무 조용했다.
평소라면
발톱 소리가 먼저 달려와
‘어서 들어와요’ 하고 반기던 자리였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몇 걸음 옮기다
갑자기
가슴 깊은 데서부터
이름 하나가 올라왔다.
“보리야.”
그는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소리로 낸다는 것은
정말로 그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다시 인정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아주 작게
한 번 불러 보았다.
“…보리야.”
그 순간 거실 공기가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선풍기도 꺼져 있었는데
벽에 걸린 작은 액자가
눈에 띄게 ‘딸깍’ 하고 흔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금속 프레임이
한 번 흔들리고 멈추는 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 짧은 사이에
그의 뇌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아마 방금 트럭이 지나갔겠지.
아파트 어디선가 문을 세게 닫았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머리는 설명을 찾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쪽에서는
전혀 다른 문장이 일어났다.
‘응, 나 여기 있어요.’
그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액자를 바라보았다.
액자 속에는
입가에 거품을 묻힌 채 웃고 있는 보리가 있었다.
목욕을 싫어해서
늘 욕실 앞에서 버티던 그 표정.
“그래, 너 맞구나.”
그는 끝내 소곤거리듯 말했다.
누가 듣고 있다면
그를 이상하게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밤,
거실과 액자와 그의 마음 한가운데에는
분명히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여기 있어.”
그 일 이후,
그는 가끔 집 안이
조금 떨리는 순간마다
먼저 이름을 불러보곤 했다.
“보리야, 맞으면
한 번만 더 흔들어 줄래?”
벽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의 일상 속에는
‘혹시’라는 작은 통로가 생겼다.
그녀는 오랫동안
자책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일찍 병원에 데려갔으면…”
“그날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하루만 먼저 검사했어도…”
머릿속에서
같은 문장이 수십 번씩 되감기 재생됐다.
밤이 되어도
눈을 감을 수 없을 만큼
죄책감이 켜켜이 쌓이던 어느 날,
그녀는 결국
침대 끝에 앉아
작게 말했다.
“한 번만… 꿈에라도 와줘.
나 좀 혼내든, 용서하든
뭐라도 말해줘.”
그날 밤,
꿈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
작은 공원.
해질 무렵의 빛.
그녀가 늘 가던 벤치.
그리고 그 앞에
그 아이가 서 있었다.
생전에 좋아하던 파란 공을
입에 물고.
“너…”
그녀가 부르려는 순간,
강아지는 툭, 하고
공을 그녀의 발 앞에 떨어뜨렸다.
현실에서 늘 하던 그대로였다.
공을 떨어뜨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기다리는 자세.
꼬리는 느리게 흔들리고,
눈동자는 반짝였다.
그녀가 허리를 굽혀
공을 집으려던 순간,
강아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강아지의 것이 아니라
낭독하듯
또렷한 사람의 목소리에 가까웠다.
“괜찮아.
난 충분히 행복했어.”
딱,
그 한 문장이었다.
그녀가 놀라서
얼른 얼굴을 들었을 때,
강아지는 이미
천천히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잠깐만, 나 아직 할 말이—”
그녀가 그렇게 외치기도 전에
꿈은
빛이 꺼지듯 사라졌다.
새벽,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방금 들었던 문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괜찮아. 난 충분히 행복했어.
그 문장은
하루 종일
그녀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도
그녀의 죄책감은
단번에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죄책감 옆에
다른 감정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감사와 안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확신.
적어도 그 한 문장은,
나보다 그 아이가 먼저 꺼내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몰라.
그녀는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누군가가 물으면
그녀는 여전히
“그냥 꿈이겠죠.”
라고 웃어 넘겼다.
그러나 밤에 불을 끄고 누우면,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 문장을 한 번 더 되뇌었다.
그래, 너는 행복했구나.
그러면 이제
나도 조금은
나를 용서해도 될까?
그는 늘
자신을 아주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보이지 않는 것 따위,
영혼, 기운, 전생.
그런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그가 키우던 강아지.
강아지는 빨간 공을 유난히 좋아했다.
색깔도, 크기도, 재질도
꼭 그 공이어야 했다.
산책을 나가면
늘 공원 한쪽 잔디밭으로
그 공을 물고 달려갔다.
공을 멀리 던져주면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
입에 물고 오는 모습이
마치 세상의 모든 상을
다 받아온 아이 같았다.
강아지가 떠난 뒤,
그는 그 공을 버리지 못했다.
책상 서랍 한 칸에
살짝 밀어 넣어 두었다.
서랍을 열 때마다
붉은 원이
짧게, 아프게 눈에 들어왔다.
어느 주말 오후,
그는 문득
공원에 나가 보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햇빛이 좋은 날이었다.
혼자 걷기 싫어
몇 번을 망설이다가도
결국 집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여전히 공원은 거기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용히 걸었다.
늘 그가 앉던 벤치가
그대로 있었다.
잠시 앉아 숨을 고르는데
멀리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잔디밭 한가운데에서
작은 아이 하나가
빨간 공을 굴리고 있었다.
색깔도, 크기도,
형태도
너무 익숙했다.
아이의 공이
잔디를 튕기며
그가 앉은 벤치 쪽으로 굴러왔다.
공은 정확히
그의 왼발 앞에서 멈췄다.
순간
그의 시간은 멈춘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수십 번, 수백 번
똑같이 반복됐던 장면.
빨간 공이
그의 발 앞에 멈추고,
자신의 강아지가
헐떡이며 뛰어와
공을 물어 가던 그 순간.
이번에는,
강아지 대신
작은 아이가 뛰어왔다.
“아저씨, 공 좀…”
아이가 허리를 굽히려는 순간,
그는 무의식적으로
공을 먼저 집어 들었다.
손 안에 닿는 감촉이
너무 익숙했다.
손바닥이
순간적으로 과거와 겹쳤다.
“공 좋아해?”
그가 물었다.
아이의 엄마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웃으며 말했다.
“네, 이상하게 이 빨간 공만 너무 좋아해요.
다른 공은 싫다 그러고요.”
그는 대답 대신
잠시 공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다운 선택이네.
마음속에서
이 문장이 저절로 떠올랐다.
공을 아이에게 건네며
그는 속으로 말했다.
“잘 놀아.
그리고…
가끔, 이렇게 놀러 와줘서 고마워.”
그가 집으로 돌아와
서랍을 열었을 때,
어딘가 준비해 둔
자기 공이 여전히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서랍 속의 공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가끔 그는 생각했다.
오늘 공원에서 본 장면은
그냥 우연일까?
머리는 늘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가슴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적어도 오늘만큼은
너다운 인사가 필요했다고
나는 믿고 싶다.
복도에서 들린 작은 떨림,
꿈속에서 들은 단 한 문장,
공원에서 다시 만난 빨간 공.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그래.”
“마음이 만들어 낸 착각이지.”
“우연일 수도 있고.”
그 말은
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험을 한 사람들은
대개 한 가지를 더 느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도…
그날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 아이가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
증명할 수 없고,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래서 더더욱
혼자만 간직하고 싶어지는 체험.
이 책은
그 체험을 두고
어느 한쪽을 강요하지 않는다.
“이건 영혼의 메시지야.”
라고 단정하지도 않고,
“그냥 환상일 뿐이야.”
라고 잘라내지도 않는다.
대신,
조심스럽게
이 단어를 올려놓는다.
영적 소통.
우리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영적 소통”이라는 말은
거창한 기적이나
초능력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이미 떠난 존재와
여전히 이어져 있다고 느끼는 순간,
그 느낌을 통해
우리의 삶이
조금 더 다정해지고,
조금 더 용서에 가까워지며,
조금 더 사랑에 머무르게 되는
모든 과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우연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신의 선물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자신의 무의식이 들려준
마지막 위로일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경험을 통과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전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사랑하고,
조금 더
천천히 고마워하며 산다.
그리고 어쩌면
그 변화야말로
무지개 다리 너머의 존재들이
우리를 향해 보내온
가장 확실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 조용한 메시지의 출처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우리가 보통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
그 끝에 서 있는 영혼을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불러보는 연습.
영적 소통의 문턱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들이
이제 막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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