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산업을 다시 상상하다 18장 AI 기반 지방 경제 활성화 전략
한국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가난한 나라가 반세기 만에 반도체, 자동차, 조선, 디스플레이 강국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하나의 강력한 힘이 있었다. 집중의 힘이다.
모든 것이 서울로 모였다. 행정도, 자본도, 인재도, 정보도 수도권에 몰렸다.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엔진처럼 돌아갔고, 결정과 실행은 번개처럼 이루어졌다. 이 집중은 산업화 시대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다. 효율은 곧 생존이었고, 속도는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다. AI와 데이터, 분산형 네트워크가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이제 집중은 효율이 아니라 병목이 되었다.
오늘의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높은 수도권 집중도를 가진 나라다. 서울·경기·인천, 이른바 수도권이 국가 인구의 절반, GDP의 절반 이상, 세수의 70%, 대기업 본사의 80%를 차지한다. 지방자치단체의 평균 재정자립도는 35% 남짓에 불과하고, 일부 지역은 20% 이하로 떨어진다.
교육·의료·문화·정보, 모든 것이 서울이라는 좌표 안에서 돌아간다. 그 결과, 지방의 청년은 떠나고, 지역의 에너지는 말라간다. 한때 효율을 위한 선택이었던 집중이 이제는 창의와 다양성을 가로막는 벽이 되어버렸다.
1960~80년대의 한국은 ‘효율이 곧 생존’이었다. 자원도, 기술도, 시간이 부족하던 시절, 성공의 유일한 길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국가의 산업정책, 교육, 교통망은 모두 수도권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
그 결과는 눈부셨다. 산업화의 기적, 압축 성장, 세계시장 진출. 수도권 중심의 중앙집중형 시스템은 20세기의 가장 강력한 성장엔진이었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속도의 시대에는 완벽했지만, 연결의 시대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이제 집중은 효율이 아니라 위험이다.
수도권 중심의 사회는 경쟁과 서열로 가득 차 있다. 모두가 같은 기준의 성공을 좇고, 다양성과 실험정신은 설 자리를 잃었다. AI 시대의 혁신은 창의적 사고와 실험에서 나오지만, 한국의 인재 구조는 여전히 ‘정답형 인간’을 길러내는 시스템에 머물러 있다.
또한 수도권의 물리적 인프라는 이미 포화 상태다. 데이터센터, 전력망, 부지, 냉각용수 어느 하나 여유가 없다. AI를 위한 전력은 지방에 있는데, 의사결정은 여전히 서울에 묶여 있다. 행정·금융·산업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구조는 재난과 사이버 공격, 정치적 혼란에도 취약하다. 모든 리스크가 한 지점에 집중된 시스템 — 이것이 지금의 한국이다.
선진국은 어떻게 균형을 찾았는가?
독일은 수도 베를린의 GDP 비중이 5% 남짓이다. 정치는 베를린, 금융은 프랑크푸르트, 자동차는 슈투트가르트, 기술혁신은 뮌헨. 각 주(州)는 자율적 재정권과 산업정책을 가진다. 한 도시가 멈춰도 나라 전체가 멈추지 않는다.
프랑스는 파리 과밀을 막기 위해 신도시를 만들었지만, 산업과 교육, 문화가 함께 옮겨가지 못해 베드타운으로 전락했다. 일본도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했으나 핵심 인력은 여전히 도쿄에 남았다. 고속철도는 오히려 도쿄 출퇴근권을 넓혔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이전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생태계의 문제라는 것. 산업, 인재, 제도, 문화가 함께 움직여야 진정한 균형이 만들어진다.
한 번 상상해 보자. 삼성이 지금처럼 한강 남쪽에 모든 핵심 기능을 두지 않고 계열사들을 전국으로 나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반도체 본사는 평택을 넘어 충청권 오창과 오송 벨트로, 디스플레이는 새만금의 RE100 산업단지로, 바이오는 오송의 바이오밸리로, AI·클라우드는 광주와 대구의 데이터센터와 맞물린다. 물류는 부산과 광양항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미래차는 울산과 대구의 로봇산업과 연결된다.
그렇게 된다면 삼성은 더 이상 한 도시에 뿌리내린 기업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엮는 하나의 산업 신경망이 된다. 그리고 각 지역은 그 기업의 ‘지사’가 아니라 공동의 혁신 거점으로 성장한다.
서울대학교가 수도권의 울타리를 넘어 단과대별로 지방의 산업과 맞물려 분화된다면 어떨까.
행정대학원은 세종에서 국가정책을 설계하고, 공대는 대전과 천안에 내려가 반도체와 에너지 기술을 연구한다. 의과대학은 오송의 의료바이오단지로, 농생명대학은 전북 익산과 제주로, 조선해양공학은 울산과 포항으로, AI대학원은 광주와 대구로 분산된다.
서울대는 하나의 캠퍼스가 아니라 전국을 연결하는 연합형 대학 시스템이 된다. 그곳에서 지역 대학과 기업이 함께 연구하고 창업한다면 지방대의 위기는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대한민국은 작지만 산업의 얼굴은 다양하다. 강원은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의 중심지, 충청은 반도체와 바이오, 전북은 해상풍력과 농생명 산업, 광주·전남은 AI와 미래차, 경북은 첨단소재와 수소, 부산·울산은 해양·조선·에너지의 허브로 성장할 수 있다.
이 지역들이 연결되어 서로의 산업이 협력하고, 데이터가 흐르고, 인재가 오가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면 한국은 하나의 거대한 분산지능국가가 된다.
왜 분산이 AI 시대의 경쟁력인가?
AI는 중앙집중보다 분산된 연결을 원한다. 수많은 현장의 데이터가 모일수록 AI는 더 똑똑해지고, 더 정밀해진다. AI의 본질은 ‘학습’이며, 학습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한국의 데이터는 전국에 흩어져 있다. 농업 데이터는 전북 들판에, 풍력 데이터는 신안 앞바다에, 로봇 데이터는 대구의 공장에, 에너지 데이터는 울산의 해안에 있다. 이 모든 현장이 AI의 원천이고, 그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이 바로 미래의 경쟁력이다. 따라서 지방 분산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AI 시대의 핵심 자원은 데이터와 에너지, 그리고 그것은 이미 수도권 밖에 존재한다.
분산의 핵심은 기관 이전이 아니다. 혁신이 현지에서 순환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기업이 있고, 대학이 있고, 지방정부가 이를 지원하며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선순환 구조. 이것이 지역경제의 킹핀이다. 그 중심에는 ‘사람이 머물 수 있는 도시’가 있다. 일자리와 교육, 의료와 문화가 함께 있고, 젊은 세대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환경. 그것이 없다면 어떤 산업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이제 상상해 보자.
서울은 여전히 전략과 금융의 중심이다. 하지만 그 명령이 전국의 산업 도시, 데이터 허브, 연구 캠퍼스와 연결된다. 삼성의 연구소와 서울대의 캠퍼스, AI 스타트업과 지방의 대학, 그리고 수많은 중소기업이 실시간으로 협업한다. 서울은 뇌가 되고, 지방은 신경망이 된다. 그리고 한국 전체가 하나의 지능체계처럼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AI 시대에 어울리는 분산지능국가의 모습이다.
한국의 산업화는 집중으로 이루어졌다. 그 집중이 한 세대를 부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AI 시대의 경쟁력은 속도가 아니라 지속성이다. 이제는 서울 중심의 명령체계가 아니라, 전국이 함께 사고하고 실험하는 네트워크형 시스템으로 바뀌어야 한다. 집중은 한 시대의 엔진이었고, 분산은 다음 시대의 지능이다. 집중은 성장을 만들었고, 분산은 지속을 만든다. 그것이 AI 시대, 한국이 가야 할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