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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벤처와 중소기업의 자립 생태계를 설계하다.

by 신피질

한국의 산업 구조는 오랫동안 대기업 중심의 수직 체계를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국가 주도형 산업화는 빠른 경제 성장을 이끌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중소기업은 독립된 경제 주체로 성장하지 못하고, 대기업의 납품망에 편입된 채 종속형 생태계로 고착되었다.


이제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산업의 논리가 완전히 바뀌고 있다. 대규모 자본보다 기술과 데이터, 그리고 창의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벤처와 중소기업이 자립형 구조를 확립하고, 대기업·정부·교육·금융이 이를 뒷받침하는 개방적 순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AI 시대의 기술 환경은 작은 기업에게도 글로벌 시장으로 나갈 기회를 준다. 클라우드 컴퓨팅, 생성형 AI는 대규모 인프라 없이도 세계와 연결되는 도구가 되었다. 한국의 에듀테크 기업인 매스프레소는 AI 기반 학습 앱 ‘콴다'를 통해 50여 개국으로 진출하며, 이용자의 90% 이상이 해외 학생들이다. 또 다른 AI 스타트업 업스테이지는 자체 언어 모델 ‘솔라 프로’를 개발해 글로벌 시장 경쟁에 나서고 있다.

메스프레소.png 메스프레소의 콴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여전히 극소수다. 대부분의 벤처와 중소기업은 여전히 대기업 납품, 정부 과제 의존, 단기 생존 중심의 구조에 갇혀 있다. 그 이유는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제도와 문화의 구조적 불균형 때문이다.

한국의 구조적 문제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노동 시장의 양극화다. 청년층은 비정규직과 단기 계약직으로 내몰리고, 안정적 일자리는 대기업과 공공부문에 집중되어 있다. 둘째, 창업 실패의 재기 불능 구조다. 한 번의 실패가 신용불량, 채무, 사회적 낙인으로 이어지는 나라에서 누가 도전을 감행하겠는가. 셋째, 교육과 문화의 폐쇄성이다. 입시 중심 교육과 ‘안정이 곧 성공’이라는 사회 인식은 새로운 세대의 창의적 도전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 세 가지가 맞물려 청년은 모험보다 안정, 창업보다 취업을 선택하고, 사회 전체의 혁신 동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 스위스,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중국은 ‘엔지니어 중심 경제’를 표방하며 기술 창업을 국가 전략으로 삼았다.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창업의 주체가 되었고, 젊은 세대는 공무원보다 창업을 꿈꾼다. 엔지니어가 부를 창조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스위스는 도제제도를 통해 청소년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기술을 익히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게 한다.


기술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마이스터로 존경받는다. 이스라엘은 실패를 허용하는 제도로 세계적인 스타트업 국가가 되었다. 창업 실패 시 손실의 70%를 정부가 보전해 주며, 실패는 경력의 일부로 인정받는다. 반면 한국은 실패하면 재기가 불가능하고, 사회는 이를 무능으로 간주한다. 이 차이가 ‘도전의 사회’와 ‘위축의 사회’를 가른다.

이제 대기업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 과거의 협력은 하청과 통제의 구조였다. 하지만 AI 시대의 생태계는 수직이 아니라 순환과 개방의 네트워크 구조로 전환되어야 한다. 대기업은 자본, 데이터, 플랫폼 인프라를 공유하고, 중소기업은 그 위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창조해야 한다. 단, 그 협력은 공정해야 한다. 지분 구조는 투명하게 설계되고, 공동 지식재산권 관리와 수익 배분이 명확히 이루어져야 한다. 대기업의 지원이 흡수가 아닌 동행으로 이어질 때, 한국 산업은 진정한 혁신 동력을 얻게 된다.

또 하나 중요한 축은 여성 기업가의 성장이다. 한국의 여성들은 사회의 절반 이상을 구성하지만, 경제의 주체로 인정받은 시간은 너무 짧다. 특히 자녀 교육의 중심에 서 있는 어머니 세대는 오랫동안 ‘안정과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여겨왔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사회가 강요한 역할의 결과다. 그러나 이제 AI 시대의 자녀 교육은 ‘안전’보다 ‘도전’, ‘성공’보다 ‘탐구’의 가치를 배워야 한다. 여성 기업가가 늘어나고, 혁신과 창의의 주체로 사회적 존경을 받는다면, 그 인식은 가정과 교육 현장으로 확산될 것이다. 결국, 여성의 경제 참여는 다음 세대의 상상력과 연결되어 있다.

여성기업가 육성.png



이러한 전환을 가능하게 하려면 제도적·문화적 기반이 동시에 변해야 한다. 정부는 실패를 흡수할 수 있는 재도전 펀드와 기술보증 면책제도를 확대해야 하고, 지방 정부는 지역 대학·연구기관·중소기업을 연결하는 산학 연계 허브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은 시험 중심이 아니라 문제 해결형으로 바뀌어야 하며, 금융권은 기술 기업의 무형 자산을 평가해 투자하는 기술 신용평가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가 존경의 기준을 바꿔야 한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여전히 정치인, 연예인, 대기업 임원, 전문직에 집중된 좁은 롤모델 체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한 사회는 다양한 영웅이 존재하는 사회다. 기술자, 연구자, 창업가, 중소기업 경영인이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존재가 아이들에게 새로운 꿈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닫혀 있는 나라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북쪽은 분단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한계는 디지털과 글로벌 네트워크로 극복할 수 있다. 세계는 이미 개방형 협력의 시대로 이동했다. AI 개발, 반도체 설계, 에너지 혁신, 기후 기술 등 새로운 산업의 경계는 국경이 아니라 데이터의 흐름으로 결정된다. 한국의 중소기업이 진정으로 자립하려면, 세계와 연결된 개방형 생태계를 기반으로 기술과 문화를 교류해야 한다.

결국 자립 생태계는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철학의 문제다. 실패를 용인하고, 기회를 재분배하며, 기술을 존중하고, 협력을 신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대기업의 공정한 지원, 여성 기업가의 성장, 청년의 도전, 정부의 제도적 보완, 교육의 개방, 그리고 사회의 존경 체계가 하나의 원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한국은 자립형 산업 구조로 도약할 수 있다. AI 시대의 경쟁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생태계의 깊이에서 결정된다. 한국이 그 깊이를 만들어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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