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산업을 다시 상상하다- 기술과 함께 만드는 새로운 길
엔비디아가 세계 최초로 시가총액 5조 달러를 돌파하고, 삼성전자 주가도 마침내 10만 원을 넘어섰다. AI와 반도체 주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시장은 이들을 단순한 전자 기업이 아니라 ‘AI 인프라의 심장’을 만든 회사로 보고 있다. 인공지능은 데이터와 알고리즘 위에서 작동하지만, 그 기반은 GPU와 HBM, 전력과 냉각 인프라 같은 물질적 토대다. 이 영역은 한국이 여전히 세계 시장에서 존재감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분야다.
이재명 정부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AI를 국가 핵심 전략으로 격상시켰다. 대통령실에 AI 미래기획수석보좌관을 신설하고, 정부 예산으로 대규모 GPU 가속기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는 단순한 산업 지원이 아니라 ‘AI 주권(Sovereign AI)’을 확보하겠다는 선언이다. 다시 말해, 외국의 인공지능을 빌려 쓰는 시대에서 벗어나 한국어와 한국적 사고를 이해하는 AI, 그리고 그것이 작동할 국내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뜻이다.
AI 생태계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는 GPT, Gemini, HyperCLOVA X처럼 대규모 데이터를 학습한 ‘AI의 두뇌’인 파운데이션 모델(Foundation Model)이다. 두 번째는 그 뇌를 실제 업무나 서비스에 활용하는 추론형(Inference Model)이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언어와 세계의 구조를 학습시키는 단계이고, 추론형은 이미 학습된 지능을 특정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 단계다. 고객 상담 챗봇이나 법률 문서 요약, 이미지 분석 서비스 등은 모두 추론형 AI의 예다.
문제는 대부분의 추론형 모델이 외국의 파운데이션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많은 국내 기업이 자체 서비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외국 모델의 API를 호출해 답을 받아온다.
API는 서로 다른 소프트웨어나 프로그램이 상호작용하고 통신할 수 있는 규칙과 체계이다.
이 구조에서는 두 가지 리스크가 생긴다. 첫째는 비용이다. 호출할 때마다 토큰 단위로 과금되어 ‘AI 사용료’가 해외로 나간다. 둘째는 의존성이다. 외국 모델이 정책을 바꾸거나 접속을 제한하면 서비스가 즉시 멈출 수 있다. 따라서 추론형 AI의 국산화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 자립과 디지털 안보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버린 AI(Sovereign AI)’는 단지 “우리도 모델을 갖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자국의 언어, 법률, 행정 체계, 문화와 산업 데이터를 외국 알고리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특히 국방과 안보 영역에서는 더욱 직접적이다. 위성 영상이나 사이버 정보가 외국 AI를 통해 분석된다면, 그것은 이미 ‘지능의 위탁’이다. 미국은 국방부 산하에 AI 전담 조직을 세웠고, 중국은 자국 전장 환경에 맞춘 전쟁형 AI를 개발하고 있다. 프랑스는 미스트랄(Mistral AI)을 통해 개방형 유럽형 파운데이션 모델을 내세워 언어와 가치의 자주성을 강조한다.
한국도 뒤처져 있지 않다. 네이버의 HyperCLOVA X는 한국어와 한국 문화 맥락을 이해하도록 설계된 초거대 언어모델이다. 네이버는 세종 데이터센터 GPU 클러스터를 구축해, 한국 인프라 위에서 자사 모델을 학습시킨다. KT, LG, SKT 등도 자체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 중이며, 정부는 국가 GPU 팜(GPU Farm)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즉, 한국은 모델과 추론, 클라우드 인프라를 묶은 ‘한국형 AI 스택’을 만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과제가 남아 있다. 첫째, 규모의 한계다. 미국의 초거대 모델 수준을 유지할 만큼 장기간 투자와 인재 풀을 확보하기 어렵다. 둘째, 생태계의 미성숙이다. 모델은 만들어졌지만 이를 활용할 산업별 서비스가 아직 부족하다. 셋째, 해외 의존성이다. 일부 기업은 여전히 외국 API를 통해 추론을 수행하고, 그만큼 데이터와 비용이 해외로 빠져나간다.
따라서 한국의 전략은 ‘모두 직접 만들자’가 아니라 ‘전략적 자립과 선택적 개방’이어야 한다. 국가 안보, 행정, 산업 기반 등 핵심 영역에서는 자국 모델과 클라우드로 독립성을 확보해야 하고, 상업 서비스나 일상형 AI 분야에서는 글로벌 모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AI는 단순한 기술 경쟁이 아니라 ‘국가의 사고력’을 둘러싼 경쟁이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국가의 두뇌이고, 추론형 AI는 그 두뇌가 사회와 대화하는 입과 손이다. 앞으로의 한국은 이 두 층을 외부에 완전히 맡길 수는 없다. 우리가 지켜야 할 생각과 판단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AI 주권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