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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의 미래와 플랫폼 개혁

4부 산업을 다시 상상하다. 17장 유통의 개편

by 신피질

한국의 거리에는 여전히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있다. 편의점, 카페, 미용실, 식당, 작은 동네 가게들. 하지만 그 불빛 뒤에는 버티기 힘든 현실이 있다. 임대료와 인건비, 재료비가 오르고 손님은 줄어든다. 자영업자의 절반이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는다. IMF 이후 수십 년 동안 직장인은 줄고 자영업자는 늘었지만, 그들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제는 손님이 줄어서가 아니라, 플랫폼이 모든 거래의 문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쿠팡, 네이버, 배민, 요기요. 소비자가 무엇을 사고 어디서 주문하든, 이 거대한 플랫폼을 거치지 않으면 팔 수 없다. 편리함과 속도는 대가를 요구했다. 수수료는 오르고, 광고비는 치솟는다. 판매 데이터는 플랫폼 서버에 쌓이고, 상인은 자신이 어떤 고객에게 무엇을 팔았는지조차 알 수 없다. AI는 상인을 돕기보다 그들의 경쟁자가 되고 있다.

쿠팡의 로켓배송은 혁신이었지만 동시에 데이터 독점의 상징이기도 하다. 쿠팡은 판매자 데이터를 학습해 어떤 제품이 잘 팔릴지를 미리 파악하고, 직접 상품을 제작하거나 자사 브랜드로 전환한다. 처음에는 상인을 불러 모으지만, 그들의 데이터를 이용해 나중에는 상인을 대체한다. AI가 이 과정을 완벽하게 자동화하면서 중소 상공인은 더 이상 자신의 시장을 갖지 못한다. 고객도, 가격도, 노출도 모두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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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조는 단순히 불공정 거래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 생태계 전체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AI를 활용한 대기업은 더 빠르게 시장을 장악하고, 소상공인은 기술 접근성의 벽에 막혀 뒤처진다. 대형 플랫폼은 수십억 건의 거래 데이터를 학습하고 거대한 AI 서버를 통해 가격과 수요를 실시간으로 조정한다. 반면 동네 상인은 POS기기 하나와 엑셀 파일로 장사를 이어간다. 기술은 평등을 약속했지만 현실에서는 격차를 고착화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다.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중소벤처기업부는 AI 기반 유통 혁신 전략을 내세우고, 지자체는 스마트 상점과 로컬 데이터 허브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시범 수준이다. 진짜 변화는 플랫폼의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AI를 대기업의 생산성 도구가 아니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공공 인프라로 재구성해야 한다.

덴마크는 이미 그 길을 걸었다. 정부가 디지털 교육, 결제 시스템, 마케팅 자동화 도구를 하나로 묶은 공공형 유통 플랫폼을 만들었다. 소상공인은 자신의 데이터와 고객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AI 수요예측과 공동 물류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다. 이 플랫폼은 경쟁이 아닌 협동의 구조로 작동한다. 정부는 플랫폼을 감독하는 규제자가 아니라 함께 설계하는 조력자가 된다.

유럽은 이 흐름을 더 확장해 Gaia-X를 출범시켰다. Gaia-X는 유럽판 데이터 연합체로, 구글이나 아마존처럼 한 기업이 데이터를 독점하지 못하도록 모든 기업이 동일한 규칙으로 정보를 주고받게 만든다. 이를 통해 중소기업도 대기업과 같은 기술 환경에서 협업할 수 있다. 기술의 문턱을 낮추고, 데이터와 AI의 접근 권한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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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정반대의 길을 간다. 정부의 개입 없이 시장이 스스로 표준을 만든다. 아마존, 월마트, 타깃이 주도하는 민간 API 생태계가 사실상 산업의 기준이 되었다. 혁신의 속도는 빠르지만, 플랫폼의 권력도 막강하다. 수천 개의 중소 상인이 이들의 생태계 안에서만 생존한다. AI는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무기로 쓰이고, 인간의 노동보다 알고리즘의 수익성이 우선한다.

중국은 다시 다른 길을 택했다. 알리바바와 텐센트 같은 거대 플랫폼이 시장을 장악하자 정부가 나섰다. 데이터는 자본이 아니라 공공 자원이라 선언하고 국가 데이터국을 신설했다. 데이터를 국가가 관리하고, 플랫폼은 공공망을 통해 접근하도록 했다. 효율적이지만 감시의 위험이 크고, 기업의 자율성은 줄어들었다. 중국식 모델은 국가가 플랫폼을 통제하는 사회주의적 디지털 구조다.

세 나라의 길은 다르지만 공통된 문제의식은 하나다. 플랫폼 독점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해친다는 것이다. AI가 인간을 이롭게 하려면, 데이터와 기술이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미국처럼 민간 중심이고, 중국처럼 플랫폼이 크며, 유럽처럼 공정성을 요구하는 사회다. 이 셋의 경계에 서 있다. 그렇다면 한국이 나아갈 길은 명확하다. 공공 표준과 민간 자율을 결합한 새로운 혼합형 모델이다. 정부는 최소한의 인프라와 데이터 규칙을 세우고, AI 분석 서비스와 클라우드를 공공 형태로 개방해야 한다. 그 위에서 민간 기업과 자영업자가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

AI 시대의 유통 개혁은 화려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소비자는 편리함 속에서 윤리를 다시 보고, 기업은 효율 속에서 공정을 다시 배워야 한다. 플랫폼은 독점의 왕국이 아니라 공정한 거래를 위한 사회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게 둘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가치를 되살릴 것인가. 한국이 그 길을 먼저 걸을 수 있다면, 기술 강국을 넘어 공정한 디지털 문명국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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