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을 이해하지 못한 왕의 문제였다
연산군은 1494년 즉위하여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기까지 약 12년간 통치했다. 이 12년은 하나의 연속된 시간이라기보다 전반기와 후반기로 명확히 구분된다. 전반기 약 6~7년은 성종대의 정책 기조를 유지하며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를 보였고, 큰 사회적 혼란이나 민생 파탄의 기록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1498년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를 거치면서 권력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이후 통치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된다.
연산군 시기의 자연조건은 특별하지 않았다. 조선은 본래 농업국가로서 가뭄과 홍수, 흉년이 반복되는 구조였다. 실제로 연산 8년에는 “近歲旱潦相仍 災異不息”이라 하여 가뭄과 홍수가 이어지고 재해가 끊이지 않았다는 보고가 올라오고, 연산 9년에는 “今年凶荒 流民甚多 餓死者亦多”라 하여 유랑민과 아사자가 증가한 상황이 기록된다. 이는 사회 안정이 흔들리는 단계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초기에는 조선의 기본 구휼 체계가 작동한다. 진제장을 설치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제하는 조치가 시행된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이 체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연산 11년에는 “自咸鏡道輸米七千石 又輸米一萬石”이라 하여 기근이 발생한 지역에서 오히려 대량의 곡식을 중앙으로 반출하는 기록이 나타난다. 같은 시기 궁중에서는 연향과 유흥, 이궁 건설과 물자 동원이 반복된다.
흉년은 새로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흉년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세종대에도 동일한 자연재해는 존재했으나, 세종은 이를 국가 책임으로 인식하고 세금 감면과 곡물 방출을 통해 피해를 분산시켰다. 반면 연산군 후반기에는 동일한 조건에서 고통이 집중된다. 국가는 완충 장치에서 압박 장치로 전환되고, 재난은 사회적 재앙으로 증폭된다.
이 차이는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 개념의 문제다. 세종은 권력을 공공의 수단으로 이해했고, 연산군은 권위를 개인의 속성으로 받아들였다.
연산군 후반기 통치의 특징은 향락과 공포의 병행이다. 실록에는 ‘흥청’이라 불리는 여성 집단이 조직되고, 전국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궁중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이 반복된다. 음악과 연회, 사치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며 이는 국가 자원의 이동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갑자사화 이후에는 폐비 윤 씨 사건을 명분으로 대규모 숙청이 이루어지고, 부관참시와 연좌 처벌이 확대된다. 처벌의 기준은 법이 아니라 감정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폭정이 아니라 권력 구조의 붕괴에서 비롯된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사림을 제거하는 사건이었고, 이는 조선의 견제 시스템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조정은 훈구와 측근 중심으로 재편되는데, 훈구는 생존을 위해 복종하고 측근은 왕의 감정을 강화한다. 정치가 사라지고 권력이 남는다.
여기서 연산군 개인의 성향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는 감각과 감정이 강한 기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음악과 향락, 표현에 대한 집착은 이러한 성향을 보여준다. 문제는 이 기질이 통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의 세자 교육은 경전과 예절 중심이었고, 감정 조절과 권력 운용에 대한 훈련은 부족했다. 여기에 궁중이라는 폐쇄적 환경과 정서적 기반의 취약성이 더해진다.
생모 없이 자란 환경, 아버지인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를 죽인 당사자이고 온화한 성품 인 점 그리고 어린 나이에 세자의 지위를 갖는 등의 부정적 영향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상태에서 권력이 주어진다. 권력은 사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성향을 극단으로 드러낸다. 연산군은 권력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자신과 동일시했다. 비판은 정치적 의견이 아니라 개인에 대한 공격이 되었고, 정치적 관계는 권력 충돌로 단순화되었다. 이는 정치력의 부재로 이어진다.
이 점에서 연산군은 로마의 Nero와 유사한 유형이다. 감각적 기질, 권력의 사유화, 반대 세력 제거, 현실과의 단절이라는 공통 구조를 보인다.
최근 한국의 내란 상황도 유사한 맥락이 보인다.
개인의 극단적 성향이 정치력 부재를 만들었다.
반대로 광해군은 다른 경로를 보여준다. 후궁 출신으로 정통성이 약했고, 임진왜란 속에서 분조를 이끌며 현실을 경험했다. 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선택했으며, 대동법 확대 등 정책적 성과를 남겼다. 두 왕의 차이는 사건이 아니라 성향과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있었다. 외적 고생과 시련, 내면의 고통은 사람을 성장시킨다. 광해군은 단련된 왕이었지만, 연산군은 그런 과정이 전혀 없었다고 생각된다.
연산군 시대의 결정적 문제는 권력 기반의 붕괴였다. 조선의 정치 구조에서 실제 권력을 지탱하던 세력은 세조 이후 형성된 훈구였다. 이들은 왕권을 지탱하는 동시에, 필요할 경우 왕을 교체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 이들은 단종을 폐위시키고, 세조를 왕으로 만들었다.
연산군은 이 구조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오사화로 사림을 제거한 이후 권력이 안정되었다고 판단했지만, 실제 기반은 여전히 훈구에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 단계에서 발생한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폐비 윤 씨 사건을 명분으로 훈구 세력까지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 정점이 한명회에 대한 부관참시였다. 이미 사망한 권력 핵심을 처형하는 것은 정치 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동시에 다수의 훈구 대신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되었다.
이 순간 연산군은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던 마지막 기반까지 스스로 붕괴시킨다.
정치는 균형 위에 존재한다. 연산군은 사림을 제거했고, 이어 훈구까지 공격했다. 남은 것은 측근과 개인적 권력뿐이었다. 그러나 측근은 권력을 유지하는 집단이 아니라 소비하는 집단이다.
결국 통치는 내부에서 지탱할 힘을 상실한다.
1506년 중종반정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발생한다. 반정의 주체는 새로운 세력이 아니라 기존 권력 구조의 핵심이었던 훈구 세력이었다. 그들은 생존과 질서 회복을 위해 왕을 제거하는 선택을 한다.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약 두 달 만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식적으로는 병사로 되어 있으나, 그 기간의 짧음을 고려하면 의문을 제기할 여지는 남는다. 다만 이는 사료로 확정할 수 없는 영역이다.
또한 연산군일기는 반정 이후 편찬된 기록으로,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부 과장되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통치가 권력 구조를 붕괴시켰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연산군의 실패는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기질적 불안정성, 정서적 기반의 취약, 교육의 한계, 궁중 환경, 그리고 견제 장치의 붕괴와 절대 권력의 결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연산군은 권력을 가졌지만, 권력을 이해하지 못한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