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기록하는 사람들 — 사초가 부른 죽음, 무오사화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로 연관시킨 사초 기록

by 한재영 신피질

조선 역사에서 흔히 말하는 사화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건이 있다. 1498년 연산군 4년에 일어난 **무오사화**이다. 후대의 역사책에서는 이것을 훈구와 사림의 정치적 대립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당시 기록을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면 사건의 출발점은 의외로 조용하다. 거대한 정치 음모나 군사 반란이 아니라 한 줄의 기록이었다. 그것도 왕조의 가장 은밀한 기록, 사초 속에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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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한 가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였다. 왕조의 정치와 행정, 학문과 의례, 심지어 왕과 대신의 대화까지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 정치의 핵심에는 언제나 기록이 있었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바로 사초(史草)였다.


사초는 사관이 매일 작성한 역사 기록의 초안이다. 왕이 어떤 말을 했는지, 대신들이 어떤 논쟁을 했는지, 어떤 정책이 논의되었는지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사관은 왕이 있는 자리에서도 기록을 멈추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이 기록을 왕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정치의 원칙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임금이라도 사초를 열람할 수 없었다. 권력이 기록을 통제하면 역사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사관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다는 것이다. 왕 앞에는 항상 두세 명 이상의 사관이 있었다. 서로 다른 사관이 동시에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일종의 상호 견제 장치였다. 한 사람이 기록을 왜곡하거나 권력에 굴복하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관의 붓이 왕권을 견제하는 또 하나의 장치이기도 했다. 세계 역사에서 이런 제도를 오랜 기간 유지한 나라는 거의 없다. 그래서 오늘날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왕조 기록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그러나 사초에는 또 다른 규칙이 있었다. 사초는 영원히 남는 기록이 아니었다. 왕이 죽으면 사초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하고, 실록 편찬이 끝나면 사초는 폐기되었다. 사초는 역사 기록의 재료였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기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초는 실록을 만든 뒤 대부분 불태워 없앴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조정은 성종실록 편찬 작업에 들어간다. 실록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초를 검토해야 한다. 왕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사초가 열람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기록이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


사관 **김일손**의 사초 속에 스승 **김종직**의 글이 인용되어 있었다. 그 글이 바로 조의제문이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역사 속 사건을 소재로 한 글이다. 진나라 멸망 후 초나라 왕으로 세워졌던 **초 의제**가 결국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을 애도하는 글이다. 김종직은 그 사건을 두고 이렇게 썼다.


“義帝無罪而見殺
天道何在”

의제는 죄가 없는데도 죽임을 당하였다.
천도의 도리는 어디에 있는가.


또 다른 구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臣弑其君
天下之大變也”

신하가 그 임금을 죽이는 것은
천하의 큰 변이다.


이 글에는 조선의 인물이나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치 속에서 글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기 시작한다. 이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바로 대신 **유자광**이었다. 그는 조의제문이 단순한 중국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 왕조의 과거 사건을 비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은 명확했다. 항우는 세조, 의제는 단종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사건은 조선 정치에서 가장 민감한 역사였다. 공식 기록에서는 단종이 영월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고 적혀 있지만 당시에도 여러 의심이 있었다. 조의제문을 그런 사건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한다면 그 의미는 단순한 역사 평론이 아니라 왕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글이 된다.


당시 왕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연산군**이었다. 사건은 곧 정치 문제로 확대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金宗直之文
指斥先王”

김종직의 글이 선왕을 비방한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史草載此文
罪不可赦”

사초에 이 글을 기록한 죄는 용서할 수 없다.


결국 사건은 처벌로 이어진다. 김일손을 비롯한 여러 인물이 처형된다.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부관참시(剖棺斬屍)가 내려진다. 부관참시는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열고 시신을 훼손하는 형벌이다. 죽은 사람에게까지 죄를 묻는 극단적인 처벌이었다.

직접 처형된 사람은 약 여섯 명 정도이고 유배와 파직을 포함하면 수십 명에 이른다. 규모로 보면 거대한 정치 숙청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건의 상징성은 매우 컸다.


김종직은 단순한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성종의 신임을 받았고 대제학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특히 영남 지역 선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학맥은 이후 조선 정치와 학문을 이끄는 인물들로 이어진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이 바로 그 흐름 속에 있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후대의 선비들은 이 사건을 특별하게 기억한다. 선비들이 권력에 의해 처음으로 죽음을 당한 사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대 역사에서 이 사건을 사화, 즉 “선비들의 화”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 더 복잡할 수도 있다.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림과 훈구라는 이름으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이런 정치 구도는 상당 부분 후대 역사 서술에서 만들어진 틀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역사 서술에서 조선 정치의 당쟁과 붕당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조선 정치 자체를 비효율적인 권력 싸움으로 묘사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래서 무오사화를 단순한 파벌 싸움으로만 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기록과 권력, 학문과 정치가 충돌한 사건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확실한 것은 한 가지다. 조선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때로 권력이 아니라 기록이었다는 사실이다. 왕도 볼 수 없었던 기록, 사초. 그 사초 속 한 줄의 글이 조선 정치의 폭풍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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