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나는 다시 좋소기업에 떨어져 있었다.

불평과 분노 대신 관찰과 기록을 선택했다.

by 윤숲





몇 개월간의 백수생활에 마침표를 찍기로 결심하고, 나는 그동안의 패턴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름의 기준을 정했다.


첫째, 유연한 근무시간과 자유로운 연차 사용.

내 성향상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번아웃을 막을 수 있었다.

둘째, 너무 인원이 많지 않을 것.

직전 회사에서는 내 업무와 관련된 사람만 40여 명이었고, 나는 인간관계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쓰고 있었다.

셋째, 퇴근 후 나의 시간이 보장될 것.

작가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야근이 많거나 주말에도 업무 관련 전화를 받는 상황은 금물이어야 했다.


잦은 이직이 큰 약점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력서를 넣으며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히 생각보다 여러 곳에서 면접 제의가 들어왔다.

그중 두 번째로 면접을 본 회사는 아주 작은 규모였고, 신사업을 이유로 증원 채용을 하고 있었다.

스타트업 느낌의 기업인데도 불구하고, 대표님이 말씀하신 몇몇 단어들이 나를 입사의 길로 매혹시켰다.


결과만 좋으면 업무 터치 없음, 재택근무도 성과만 좋으면 가능, 연봉도 어느 정도 기존 수준유지(사실 살짝 후퇴했지만).

기존 업력이 10년 이상이기에 어느 정도 체계는 있겠거니 했다.

물론 체계적으로 회사를 운영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일전에 스타트업 기업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거기보다는 낫겠지!'하고 오만하게도 나는 내 능력과 경력을 과신해 버린 것이다.


입사 첫날, 대표님은 달랑 두세 장짜리 문서하나, 그리고 사진 몇 장 달랑 박힌 10장짜리 PPT 예시 파일을 보내주면서 말했다.


"그 내용 바탕으로 제품 팜플렛 좀 만들어줘요. 책자로 인쇄할 거니까 예쁘게 좀 부탁해요~! 요새는 AI 쓰면 금방이지, 뭐!"

"네, 네?"(속마음: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었나?)

"하하, 서류 만드는 거니까~"


맙소사!

분명 내가 맡을 업무는 각종 사내 서류를 관리하는 거라고 했었다. 그 범위가 이렇게까지 확대될 줄이야.

입사 첫날 내가 받은 문서는 난생처음 보는 IT기술에 관한 것으로, 해당 분야에 상당한 이해가 필요한 서류였다.

게다가 기획부터 원고작성, 인쇄를 고려한 디자인 영역까지 전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 작업은, 사회초년생부터 줄곧 경영지원팀에서 회계 중심의 업무를 해왔던 나의 커리어와는 결이 다른 꽤 생뚱맞은 것이었다.


'이, 이건... 전형적인...'

벌써부터 익숙한 냄새가 났다.

나에게 귀신같이 좋소 기업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는 건가, 아니면 이 세상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좋소 기업인 것인가.

아니, 이건 나의 마음가짐 문제일 수도 있다.

혹시 내가 너무 빨리 결론을 내려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과,

학습된 과거사에 의한 반발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함께 스쳤다.

그래서 나는 정신없이 헤매면서도,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했다.

솔직히 막막했다. 디자인 영역에 전문가가 아닌 내가 만든 엉성한 책자를 실물로 인쇄한다니.

인쇄를 한다는 건 직접적으로 비용이 나가는 일이기 때문에 걱정이 됐다.

혼미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냈고, 며칠이 지나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어놓고는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칭찬에 마음이 마냥 뿌듯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또 어떤 맥락 없는 지시들이 날아들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퇴사할 거냐고!'

그날, 회사를 나서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 그동안 다짐했던 것들을 떠올렸다.

주변환경에 불평만 하기보다 해결책을 찾는 연습을 해보자.

급여를 받는 것에 누가 되지 않게 회사 일을 열심히 하되, 거기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자.


걷는 것도 잊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숨을 크게 몰아쉬며 몇 분 동안 생각했다.


퇴사? 아니, 그것보다 취재를 해보는 건 어떨까?

도망치기보다는 이런 일들을 작은 글감으로 이용해서, 여태껏 중소기업에 재직하며 겪었던 이런저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글을 써보면 어떨까?


그러면 한걸음 물러서 상황을 지켜보며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제점뿐만 아니라 장점 또한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이미 결론은 나 있었다.

나는 이제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취재기자로서 나의 좋소 기업에 출근해 보기로 했다.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