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온도_34

by 슬로우

오현숙이 나가고 한참 뒤, 도윤은 카운터 뒤에 조용히 기대어 섰다. 창밖으로 햇살이 사선으로 기울고 있었고, 아까 그녀가 마시다 남긴 머그잔 안에는 미처 다 마시지 못한 커피가 식고 있었다.


아파트 값, 미국 주식, 재건축, ETF.


그 단어들이 가게 안을 떠다니던 잔향처럼 그의 머릿속에 남았다. 한때 도윤도 ‘수익률’이라는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시절이 있었다. 팀 단위 수익 보고, 분기 실적 프레젠테이션, 거래처별 매출 실적 등 모든 게 숫자로 정리되고 평가되던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죽어라 일했다. 야근을 밥 먹듯 했고, 주말에도 매장을 돌며 매출을 관리했다. 매일, 매주 제출하는 보고서는 한 줄 한 줄을 정성스럽게 썼고, 팀워크를 위해 팀원들에게 점심을 자주 사주고, 때로는 상사의 분노를 중간에서 막았다.


그렇게 십 수년을 버텼는데, 남은 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은 건 '이 커피숍 하나'였다.


퇴직하고, 병원에 다니고, 불안과 좌절속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뒤에야 문득 떠오른 게 ‘커피’였다. 커피를 마실 때만큼은, 누구도 자신을 재촉하지 않았다. 커피가 내려오는 2분 남짓의 시간, 아무 말없이 기다리는 그 정적 속에 마음이 조금씩 정돈됐다.


오현숙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생각했다. 자신은 주식도, 부동산도, 자랑할 만한 투자도 없다. 그저 시간과 마음을 조금 들여 커피를 내릴 줄 아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게, 오현숙 같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잠시나마 위로를 받는 이유라면, 그 또한 나쁘지 않은 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윤은 다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남아 있는 잔들을 정리하고, 메뉴판을 닦았다. 그리고 다음 손님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이 커피숍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이지만, 때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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