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군주론과 더불어 생각하는
나는 쭈구리다. 식당을 가든 어딜 가든 맨 구석 귀퉁이 자리를 선호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뒤로 빠져 입을 다문다. 특별히 부끄럽다기보다는 보편적인 사람들과 일상 주제에 대해 큰 관심이 안 생기기 때문이다. 별로 주목받고 싶지도 않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들 하는데, 내가 느끼기에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너무 과한 것 같아 벅차고 부담스러울 경우가 많다. 부득이하게 어딘가 속하게 된다면 나는 주로 변두리에서 투명인간처럼 보이려고 한다. 리더가 지시하는 일을 묵묵히 하고 조직에 피해를 주지 않으며 맡은 바 역할은 하되, 튀지 않게 묻어가려고 애쓰는 편이다.
조직에서 어떤 장(長), 그러니까 우두머리나 리더를 맡는 경우 권력이 주어지는 만큼 그만한 책임이 따르기도 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누구에게나 그럴싸하게 보일 만큼의 능력을 선보여야 하므로 나는 굳이 나서지 않으려는 편이다. 하지만 삶이란 꼭 내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내 의지 또한 내 평소 주된 의지와 다르게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추천 등 의도치 않게 등 떠밀려 그런 자리에 오르게 되기도 하고, 당장 해야 할 과업이 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아 진척이 없는 경우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겠을 때 내가 나선다.
사실 열네 살 때, 첫 여자 대통령이 탄생하기 이전 장래희망이 두 번째 여자 대통령이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운동장에 세계 지도를 그려놓고, 반 친구들을 불러 모아 너희들은 영어 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 왜냐면 내가 대통령이 돼서 만국 공용어를 한국어로 만들 거거든. 하며 당찬 포부를 밝힌 적도 있다. 입사 직후 수습시절, 어떤 선배님이 내가 하도 인기가 많아서 마치 연예인 같다, 저녁에 술 한번 사주려면 예약 대기가 너무 길다고 푸념을 하시길래, 아닙니다 저는 슈퍼 쭈구리예요. 했다가 슈쭈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삼십 대인 지금 나는 그냥 쭈구리다.
슈퍼 쭈구리도 아니고 그냥 쭈구리인 내가 지금 두 가지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 계기도 약간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 가을을 주제로 한 어떤 유명 작가님의 기한 지난 프로젝트에 지원했다가 인원이 다 찼다는 소식을 듣고 실망한 나머지, 즉흥적으로 그렇다면 겨울 주제로 내가 팀하나 만들지 뭐. 하고서는 일을 하나 벌인 것이 크리스마스 악몽 주제 협업 프로젝트다. 추후 가을 주제 프로젝트에 끼워졌으나 다른 작가님들의 작품들이 내 감성과 맞지않게 너무 촉촉하고 예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얼마 뒤 술에 잘못 취한 어느 날, 아이디어가 떠올라 취한 사람들끼리 아무 말 대잔글을 쓰면 참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 취글 프로젝트까지 기획하게 되었다. 후자는 다음날 술이 깨고 없던 일로 하려고 했으나 참여의사를 밝힌 선량한 작가님들의 독촉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현실에서 진행하게 되었다.
나는 계획성이라는 것이 거의 전무하고, 주로 늘 타인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빌붙어 사는 사람으로서, 내 한 몸을 건사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데. 각 분야의 여러 대단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스스로 황당했다.
사실 나는 남을 부리는 일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우리 할머니가 우리 공주는 사람을 부리고 살아야 한다며, 공주님 식사하시지요, 하며 나를 품에 끼운 채 어릴 때부터 말도 안 되게 떠받들어 준 탓도 있고, 남자가 70퍼센트인 대학과 남초 직장에 다니다 보니 내 손으로 뭔가를 직접 할 일이 잘 없기도 했다. 또 막상 내가 뭔가 하려고 하면 그게 또 불안불안해 보인다며 사람들이 내 손에 가위라든지 집게라든지 도구를 잘 들지 못하게 했으므로 실용성을 기를 기회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사람은 신기하게도 뭔가를 하는 사람만 하고, 안 하는 사람은 계속 안 하는 삶을 살게 된다. 받는 사람은 계속 받고 주는 사람은 계속 준다. 그런 식의 삶의 태도가 사람의 몸과 정신에 익어서, 주는 사람은 주지 않고는 못 배기고, 받는 사람은 받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버린다. 불공평해보이지만 누가 시키는 게 아닌데도 그렇다. 그래서 내 생각은 항상 당당한 태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지위라든지 가진 것이 대단하지 않을지라도 굳이 연연하거나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굴면, 딱히 뭐가 없고 직접 요구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알아서 대접을 해 준다. 내가 경험해본바 그렇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군주가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라고 했다. 필요할 때는 짐승의 방식도 사용하라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군주 자신의 역량과 능력과 결단력 또한 우선적으로 갖춰야 한다. 단순히 공포심만 자극해서는 구성원들의 신심 어린 충성을 살 수 없다. 반면 군주가 너무 너그럽기만 하다 보면 중우정치로 빠져 나라가 망한다. 가장 중요한 자신의 능력과 도덕성을 먼저 갖추고, 적당한 카리스마를 보이고, 인재를 발탁해 적재적소에 기능하게 해서 목표에 도달하는 방식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그런 면에서 지금 내가 주도하고 있는 프로젝트 두 건은 아주 잘 진행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다. 유능한 인재들을 찾아 감투를 씌우고, 역할을 다하지 못한 인재로부터 가차 없이 감투를 회수하고, 강퇴로 협박하며, 성취를 해낸 인재에게는 인정과 감사를 아낌없이 표현하는 방식으로. 군주론까지 끌어와 말할 것까진 아니지만, 히키코모리 아웃사이더 소시오패스로 살던 내가, 쭈구리 리더로서 그럭저럭 벌여놓은 일을 잘 진행해 나가고 있는 듯하다. 조만간 취글 프로젝트가 개시될 예정이다.
개회사는 이렇다. 가장 먼저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제 자신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함께해 주신 대작가님들께 그 다음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