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약약약

강강약약으로 위장한

by Ubermensch





나에겐 귀엽거나 예쁘거나 잘생기거나 남루해 보이거나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하염없이 약해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오늘은 모처럼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우리 층 청소를 담당하시는 여사님께서 사무실 문을 빼꼼 열고 실무관님을 찾으시길래 저에게 말씀해주시면 된다고 하며 문밖으로 나갔다. 바퀴가 달린 커다란 파란색 이동식 쓰레기통과 빗자루를 뒤로 한채 환경미화용 유니폼을 입은 여사님은 그 존재만으로 나를 압도해 버렸고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죄지은 듯한 기분으로 서서 그녀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용건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사무실 열쇠에 달린 고양이 키링이 문제였다. 이 층 모든 검사실이 귀여운 키링을 쓰고 싶은 마음은 마찬가지일 텐데, 우리 사무실만 고양이 키링을 달고 있다고 한다. 그 키링을 내가 단 것은 아니고 내 앞자리 계장님이 단 것이었지만 여사님께 그 사실이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공손하게 경청의 태도를 유지했다.


보통 검사실에서 사무실 열쇠를 숨겨놓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데, 우리 사무실 옆은 민원인이 수시로 지나다니는 곳이므로 앞자리 계장님께서는 보안상 우리 사무실 열쇠를 그곳에 두기엔 위험하다며 다른 장소를 지정해 두신 바 있다. 여사님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고양이 키링을 뗄 것. 2. 열쇠를 다른 검사실에서 열쇠를 숨겨두는 장소에 동일하게 둘 것.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의 조건은 2로부터 발생한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가 열쇠를 두던 장소에 둘 경우 고양이 키링이 붙어있든 맘모스 키링이 붙어있든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1의 위치에서는 고양이 키링의 무게로 인해 열쇠가 낙하할 여지가 있는데, 그러면 여사님이 가지고 다니는 바퀴가 달린 커다란 파란색 쓰레기통으로 열쇠가 떨어질 수 있고, 그러면 쓰레기통을 뒤져 열쇠를 찾아야 하기 때문에 고양이 키링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2의 조건은 여사님께서도 우리가 열쇠를 숨기는 위치를 알고 있고 지금까지 잘 지내왔는데 왜 민원인들이 쉽게 발견할 여지가 있는 그곳에 열쇠를 숨겨야 하는지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건 본인이 휴가를 갈 수가 있는데 그러면 대직을 하는 다른 여사님께서 본인에게 전화를 걸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숨기는 장소에 열쇠를 두어야 맞는 것이라고 했다. 약 10분간 이어진 일장연설을 공손히 경청한 나는 여사님께 잘 알겠다고 고양이 키링도 떼고 앞으로는 열쇠도 다른 검사실이 숨기는 위치에 숨길 것이며, 우리 524호실 사람들에게 내용을 전파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여사님께서는 만족하시는 듯했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원하는 목적을 달성한 여사님은 뒤이어 기세등등하게 525호 우리 부장님 방으로 향했다. 보통 부장검사님께는 검사님이라는 호칭 대신 부장님이라고 칭한다. 부부장검사님도 높여 부르며 부장님이라고 한다. 하지만 문 앞에 부장검사 누구라고 쓰여있음에도, 여사님은 우리 부장님께 검사님 이 자리에 이 책상이 꼭 있어야 하나요? 제가 청소를 하기가 불편해서요.라고 하셨다. 우리 부장님은 좀 전의 나와 마찬가지로 왜인지 위축이 되셔서는, 업무를 하기 위해서는 그 책상이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죄지은 사람처럼, 더듬더듬 말씀하셨다.


잠시 후 앞자리 계장님이 출근하셨고, 나는 고양이 키링을 제거하고 앞으로 우리가 다른 검사실이 열쇠를 숨기는 곳에 열쇠를 숨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드렸다. 그리고 우리 부장님의 책상 위치 논란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계장님은 크게 분노하셨다. 앞자리 계장님은 나와 사무실만 공유할 뿐, 우리 부장님과 아무 관계도 없다. 계장님 소속 부장님은 523호 김 부장님이다. 아니, 부장님 기수가 차장님보다 더 높은데 뭐 검사님? 책상을 치우라고? 크게 분개하시더니 곧바로 시설팀 연락처를 찾으셨다. 공식적으로 항의를 한다고 하셨다. 나는 힘들게 청소하시는 여사님께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말렸지만 분노한 계장님의 기세를 막을 수 없었다. 실무관님도 거들었다. 저도 여사님도 같은 공무직인데 제가 부장님이 기록을 주시면 불편하니까 다른 날 주세요. 하면서 거부해도 되는가요? 하셨다. 나는 실무관님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행정사무를 보시지만 여사님은 변기도 닦고 쓰레기통을 끌고 다니시잖아요, 차이가 좀 있지 않나요. 했다.


하지만 524호에서 내 관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시설관리팀과 연락이 닿지 않자 계장님께서는 직접 여사님을 찾아 나섰다. 나는 지나가다 두 분이 서있는 그 장면을 목격해버렸고, 마음이 안좋아 차마 보지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계장님께서는 여사님께 일하시는 곳의 위계를 아셔야 한다. 부장님은 이 층에서 가장 높은 분이시다. 청소가 힘들다고 책상을 치우라고 말씀하시는 게 이치에 맞냐고 좋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당사자인 우리 부장님도, 부장님 소속 단독 계장인 나도 별 말을 하지 못했는데, 우리 검사실과 아무 연관도 없는 앞자리 계장님께서는 크게 분개하시며 행동하셨다. 나는 부장님께 면목이 없다고, 저는 부장님의 권위를 지켜드리지 못했다고. 저를 버리고 앞자리 계장님으로 교체하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저는 부장님의 가족이니까 버리는건 안되실것 같다고. 그냥 계장님을 우리 식구로 생각하기로 하자고 했다.


평소 나는 선배님, 주임 검사님, 부장님께까지 갖은 건방을 다 떨고 까분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 부장님이 직접 물을 끓여 내려주시는 커피를 당연하게 자리에 앉아 받아먹고, 어제는 한때 함께 일했던 믿구비언 검사님께 폰팔이, 차팔이, 삐끼처럼 생기셨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왜 바퀴 달린 커다란 파란 쓰레기통을 끌고 다니는 청소 여사님의 선을 넘는 요구에 아무 말도 못 하는 쭈구리가 되어버린 건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우리 부장님도 마찬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