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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기쁨과 슬픔

먹고산다는 것의 고단함에 대하여

by Ubermensch








스무 살, 수능을 보고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하자마자 그 해 3월에 인문대에서 제일 잘생기고 키 크고 몸 좋은 남자애랑 과 CC가 되었고, 그 이후로 쭉 4학년때까지 연애를 했다. 학교 신문사에서 기자를 선발한다길래 면접을 보고 시험을 보고 합격해서 학생기자가 됐다. 신문사는 단순 동아리가 아니라 나름 교내 기관이어서 장학금을 준다고 했다. 엄마한테 장학금을 받으니 미리 당겨 달라고 해서, 옷도 사고 화장품도 사고 놀고먹고 썼다.


신문사 생활은 개똥 군기도 있고 술도 많이 먹고 취재도 다니고 이런저런 외부 활동도 많았다. 연애도 해야 하고 술도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먹어야 하고 기사도 써야 하고 날밤도 새야 하고.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중국어 회화 같은 아무 관심도 없는 아침 강의는 빼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이 강의 저 강의 빠지다 보니 F학점이 몇 개 생겼고, 어느 날 아침 선배네 집에서 술에 취해 깨어났을 때 엄마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집에 성적표가 왔는데, 넌 아무래도 공부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으니 학교를 때려치우고 공장에나 가라고. 눈을 비비며 집에 가보니 도어록 비밀번호가 바뀌어 있었다.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30분쯤 타고 있으니까 이제 들어오라고 전화가 왔다. 내가 미리 당겨 쓴 신문사 장학금은 학점이 2.0이 넘어야 받을 수 있었는데, F학점을 몇 개 받았더니 총 평균이 1.95점이 나와서 장학금을 못 받게 됐다. 엄마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어 쓰라고 했다. 그렇게 스무 살 여름방학 때부터 서른 중반인 지금까지, 나는 한 달도 쉬지 않고 쭉 일을 하고 있다.


거의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치킨집 홀 서빙부터 시작해서 전단지 배부, 손모델, 학원강사, 초중고 국영수 과외, 논술 과외, 카페, 편의점, 아이스크림가게, 헬스장, 전시회장, 레스토랑, 일식집, 빵집 등등. 당시 과 동기 언니는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10살 연상의 외국인 남자 친구를 사귀고선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하게 되었고, 비싼 가방도 선물 받아 매고 다니면서, 왜 굳이 최저 임금 받으면서 서빙이나 하냐고 본인처럼 바 알바를 하라고 권유하길래, 저는 그냥 최저임금 받으면서 잘생긴 동갑 남자 친구랑 동네에서 손 붙잡고 떡볶이 먹겠다고 했다. 그때도 언니가 부럽진 않았고, 팍팍하지만 풋풋한 연애를 했던걸 지금도 후회하진 않는다. 지금 생각해도 제일 예쁜 기억이라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기간에도 일은 계속했다. 주중엔 다섯 평도 안 되는 자취방에 콕 틀어박혀 공부하고, 주말엔 카페에서 하루 종일 일했다. 9개월간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낮에는 자고 밤에는 공부를 했는데, 가끔 갑갑하면 옥상에 올라가서 노래 몇 곡 듣고 내려오곤 했다. 동틀 무렵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수레를 끌고 폐지 줍는 사람들,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어디론가 바삐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여서 뭉클했다. 다들 저렇게 열심히 치열하게 사는구나, 하고.


스무 살 갓 넘은 뽀시래기가 맞닥뜨린 사회는 녹록지 않았다. 서빙을 하다가 손님에게 음료를 쏟기도 하고, 컵과 집기를 깨부수기 일쑤였고, 술에 취한 아저씨들의 추행도 일상이고, 무서운 언니들의 텃세도 심했고, 진상 손님들에게 시달리다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뻗어버리곤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험한 일을 안 해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내 성적은 항상 전국 상위 몇 프로 이내였는데, 왜 이렇게 예쁘고 흰 내 고사리손이 빨갛게 틀 때까지 고생을 해야 할까 싶기도 했다. 나중엔 부잣집에 태어나서 이런 거 안 하고 하고 싶은 공부만 마음껏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해보기도 하고. 어쨌든 그 길고 다양한 아르바이트 역사 덕분에 나는 아이스크림도 예쁜 모양으로 잘 담고, 커피도 잘 만들고, 설명도 잘하고, 참을성과 책임감도 남다르게 발달하고, 불합리함도 감수할 줄 알게 되고, 돈 버는 게 아주 치사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오늘은 인사이동 첫날이다. 형사부에 처음 와서, 내 또래 다른 부 동기들은 짬이 안 돼서 막내 계장으로 서무나 하고 있는데 나는 어쩌다 보니 선임 계장 자리에 앉아 후배가 깍듯이 모셔준다. 경험도 미천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앉아 있자니 어안이 벙벙하다. 스무 살 초반,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채 커피 내리고 빵 굽고 의자 정리하며 뽈뽈거리던 시절이 생각나 감회가 새롭다. 언제 내가 이렇게 자랐나 싶어서 괜히 어엿해진 느낌에 우쭐하기도 하고 좀 늙은 것 같아 서글픈 마음도 든다. 때가 일러도 한참 이른 선임계장 자리의 무게만큼 더 잘 해내고 싶어진다.


10년 전 수습수사관 시절, 한겨울 늦게까지 군기 바짝 잡히는 회식을 하고 새벽 6시에 술이 덜 깬 채로 회사에 출근한 적이 있다. 너무 춥고 깜깜한데, 청소하시는 여사님이 따뜻하게 웃으며 인사를 해주시길래, 날씨가 추운데 이른 시간에 나오셔서 많이 힘드시죠, 하고 나답지 않은 살가운 말을 건네보았다. 여사님은 내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른이잖아요. 했는데, 어른들은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힘든 내색도 없이 씩씩하게 사는구나. 게다가 이렇게 춥고 어두운 날에, 밝고 따뜻해 보이기까지 할 수 있구나 싶어서 더 멋졌다.






10대엔 공부만 하고, 20대부터 30대까지는 일만 하고, 돌이켜보면 나 참 팍팍하게 살았다. 고생 많았네, 짠하네 싶은데. 그 사이사이 스쳐지난 사람들과 나눈 말 한마디, 함께 나눈 웃음 속 위안, 그 안에 담긴 온기 같은 것들이 깜깜한 밤 가로등처럼 군데군데 빛으로 남아서, 그 밤이 그렇게 외롭고 괴롭지만은 않았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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