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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곤조

"내가 낸데."

by Ubermensch





한때 내 차에 자주 타던 경상도 출신 후배가 내 운전방식에 대해 끊임없는 훈수를 두더니, 차라리 안 보련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선배님은 내가 낸데 식으로 운전을 하시네요, 했다.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내지 뭐.


내 차는 2019년도에 2만 킬로를 주행한 15년식 중고차였다. 운전이란 면허연습장에서 해본 게 전부였고, 한방에 합격하자마자 덜컥 차를 계약해서 회사로 운반해 달라고 했다. 멋모르는 내가 중고차 사기라도 당할까 봐 당시 과장님, 선배님들이 우르르 따라 나와서, 뭘 알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차 보닛을 열고 타이어를 쿡쿡 눌러보며 위압감을 조성해서, 차를 가져온 직원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차는 멀쩡했고, 빛났고 하얗고 예뻤다. 나는 이름도 붙여줬다. 뽀동이라고. 처음 뽀동이에게 조그마한 흠집이라도 나면 차라리 내 몸이 다치는 게 더 낫겠다며 마음 아파했는데, 지금 스무 번쯤의 사고 가해 차량이 된 뽀동이는 누더기 신세다. 찌그러지고 깨지고 녹도 슬었다.


나는 곤조가 좀 있다. 남들이 보는 나보다, 내가 보는 내 모습이 더 중요하다. 세상이나 하늘이나 신에게 부끄럽지 않기보단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거고, 남들 시선보다는 내 기준에 내가 떳떳해야만 한다. 칸트의 정언 명령(定言命令) 같은 거다. 이건 의무론적 윤리학에서 도덕적 행위의 최고 원리로, 어떤 조건이나 결과에 의존하지 않고 그 행위 자체가 절대적으로 올바르기에 의무적으로 따라야 하는 무조건적인 명령인데, 그건 내 마음속에 있다. 이렇게 살려면 아주 불편하고 고독할 수밖에 없고 보편적 사람들 기준에 모나고 이상해 보이며 욕을 많이 먹는다.


학창 시절 또래집단에서는 별명이나 애칭을 지어 부르며 유대감을 형성하는데, 나는 그냥 이름 그대로를 불렀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꺄르르 웃어주고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나누곤 하지만, 나는 웃기지 않으면 무표정을 유지하고 칭찬거리가 없으면 침묵한다. 인기 있는 아이돌을 좋아해 본 적도 없고 누가 유명한지도 모른다. 선배나 상사가 아재개그를 하면 절대 웃어주지 않고 무시하거나 못 들은 척 다른 곳을 본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이런 식이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은은하게 돌아있다는 둥, 개썅마이웨이라는 둥, 뭐 저딴 싹수없는 게 다 있냐는 둥, 노빠꾸인생이라는 둥 하는데, 그 곤조를 유지하며 사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지 아마 상상도 못 할 거다. 뒤에서 엄청난 험담을 하는걸 알게 되고, 두루두루 잘 지내며 얻을 수 있는 많은 기회를 놓치고, 이런저런 오해를 사고, 재수 없어 보이고, 지적도 엄청 당한다. 가족들은 이런 나를 걱정하며, 쟤는 성격이 저래서 정말 큰일이야. 좀 유들유들하고 휘어질 줄 알아야 하는데 저러다 툭 꺾이고 부러지지. 한다.


이 내가 낸데식 곤조가 나를 곤란한 처지로 몰아넣을 때가 많기 때문에, 이걸 좀 어떻게 고쳐봐야 하나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결론은 그냥 살던 대로 살기로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위대한 철학자 니체는 본인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라는 책에서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가 / 나는 왜 이렇게 훌륭한 책을 쓰는가 등을 말하며 자기 찬양을 한다. 니체는 당대 학계에서 외면당했고 인간관계도 엉망이고 미쳤다는 평판을 들었지만 후대에 빛나는 철학 사상을 남겼다. 그래서 내가 니체에 꽂혔던 것 같다. 비슷한 점이 많아서.





뭐 좀 별나고 이상하고 남들과 다르고 지밖에 모르면 어떤가. 내가 스스로 당당하고 나 자신을 멋지게 보는 게 나에겐 가장 중요해서 그렇다. 그래서 그냥 앞으로도, 좀 불편을 감수하고서라도 생긴 대로 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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