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시장'이 아닌 '팀'과 싸우고 있었다
새로운 언어의 첫 표현
내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던 나의 객기는, 다음 날 아침 이불속에서부터 처절한 후회로 바뀌었다. 새로운 언어를 배웠다는 착각은 밤사이에 증발하고, 40년 동안 사용해 온 낡은 언어의 습관만이 온몸을 지배했다. B언어를 쓰겠다고 마음먹은 첫날, 나는 오히려 입을 닫아버렸다. 혹시나 또 A언어가 튀어나가 상대를 할퀴거나, 어설픈 B언어로 비웃음을 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변화는 의외의 곳에서, 가장 원치 않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오후에 열린 긴급 팀 회의. 팀장이 회의실 문을 닫는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딘가 지쳐 보이는 그의 얼굴. 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아니나 다를까, 팀장은 어려운 결정을 내리듯 입을 열었다.
"팀장 회의에서 결정된 사안입니다. 다른 부서에 갑작스러운 육아휴직자가 발생해서... 우리 팀 막내를 그쪽으로 한동안 보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순간, 회의실 안의 모든 소음이 멎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몇 달간의 결원이 이제 막 보충된 참이었다. 그동안 팀원들의 부담을 줄이려 밤마다 모니터 앞에서 홀로 시간을 죽여왔던 내 노력은 대체 무엇이었나.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 팀원을, 그것도 이제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한 막내를 빼가겠다고?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우리 팀의 프로젝트는 단 한 명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살얼음판 같은 상황인데, 여기서 인원을 빼가는 것이 말이 되는가. 불합리하다. 부당하다. 나의 머릿속은 '명분의 언어(A언어)'로 된 항변으로 들끓었다.
우리의 진짜 적은 누구인가
나는 그동안 거대한 착각 속에 살았다. 회사를 하나의 팀으로, 그리고 그 안의 다른 부서나 동료들을 경쟁자로 규정했다. 한정된 자원과 승진 자리를 놓고 싸우는 제로섬 게임. 그것이 내가 지난 20년간 조직에서 배운 유일한 생존 논리였다. 하지만 이 논리가 정말 최선이었을까? 이 치열한 내부 경쟁이 정말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고 있었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일로 효과(Silo Effect)'라는 현상. 부서들이 서로 담을 쌓고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 만약 내부 경쟁이 최선이라면, 삼성전자의 MX사업부와 시스템 LSI 사업부의 싸움은 왜 '엑시노스'라는 핵심 부품의 경쟁력 상실로 이어졌을까? 그들의 처절한 내부 전쟁의 최종 승자는 왜 외부의 경쟁자인 애플과 퀄컴이 되어야만 했을까?
그 순간, 내가 믿어온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벌이던 싸움은 성장을 위한 건강한 경쟁이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탄 '팀원'이었지만, 우리의 진짜 경쟁 상대인 '시장'이라는 거대한 폭풍은 외면한 채, 갑판 위에서 서로의 몫을 뺏기 위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나의 논리는 틀린 것을 넘어, 우리 모두를 침몰시키는 파괴적인 함정이었다.
이해관계의 재구성: B언어로 다시 쓴 손익계산서
팀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한숨을 쉬었고, 누군가는 옆 동료와 무언의 눈빛을 교환했다. '누가 총대를 멜 것인가' 하는 보이지 않는 탐색전 속에서 시선은 자연스레 나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들의 의도에 동참하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서서 이 상황을 B언어, 즉 '이해의 논리'로 다시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회사의 이익: 큰 손실은 없다. 왼쪽 주머니의 것을 빼서 오른쪽 주머니를 채우는 것일 뿐. 임시 결원 때문에 신규 인력을 충원하는 것이 오히려 손실이다.
상대 팀의 이익: 명확하다. 자신들의 업무 공백을 최소화하고 KPI를 방어하는 것. 우리 팀의 사정은 그들의 계산에 없다.
팀장의 이익: 회의에서 A언어로 저항했지만, 가장 경험이 적은 그의 주장은 묵살당했을 것이다. 그는 조직의 결정을 따르면서 팀원들의 반발을 감당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팀원들의 이익 (그리고 '예전의 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다. 막내가 하던 일을 최대한 적게 떠맡는 것. 부당함에 맞서는 것은 '의리 있는 누군가'에게 맡기고, 각자 자기 몫의 업무를 방어하는 데 집중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수는 무엇인가. 이 위기를 나의 호재로 만들 기회. 이 복잡한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나의 가치를 증명하고, 다음 승진과 연봉 협상에서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카드를 손에 쥐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판에 직접 뛰어들어야 한다.
다시 쓰는 아군 식별법
계산은 끝났다. 나는 더 이상 불평하거나 방어하지 않기로 했다. 이 난장판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기꺼이 해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회의가 무거운 침묵 속에 끝나고, 팀원들은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팀장의 자리로 다가갔다.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이는 그의 뒷모습. 나는 나의 B언어(승진, 고과)를 A언어(회사와 팀을 위한 헌신)로 완벽하게 포장하여, 나의 첫 번째 제안을 건넸다.
"팀장님, 어려운 상황이지만 오히려 우리 팀의 역량을 보여줄 기회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번 인력 재배치 문제는 제가 책임지고 두 부서 간의 업무를 조율하고, 가장 효율적인 분담 방안도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막내를 보내주는 대신, 그 친구가 맡고 있던 업무 일부를 저쪽 팀으로 함께 떼어주는 겁니다. 인력만 가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해당하는 업무 부담도 함께 덜어내는 거죠. 그래야 남은 우리 팀원들도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팀원들과 구체적으로 논의해서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팀장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표정에서 놀라움과 희미한 기대감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조용히 내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를 켰다.
이제 나는 다른 사람들의 A언어 뒤에 숨겨진 B언어를 해석하기 위해,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이 안테나를 세웠다. 게임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