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를 끌어안는 법

사회라는 불, 그리고 나와의 적정거리

by 밑줄

게임의 시작, 그리고 선제공격


게임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상대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그것도 회의 다음 날 출근길에서. 우연을 가장한 채 다가온 옆 팀 김 선임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래, 황 선임. 들었지? 우리가 이번에 좀 급해서 그래. 미국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협력업체부터 라인까지 전부 다시 세팅해야 하는데 갑자기 휴직이라니. 그냥 우리 업무 백업할 사람 하나만 필요한 거니까 너무 걱정 말고. 원래 없이도 잘해왔잖아?"


그는 나보다 한 해 선배지만, 평소엔 아는 척도 않던 사람이었다. 오늘 그의 우연한 등장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B언어는 명확했다.

"사람 빨리 보내. 그리고 이건 너희 팀보다 우리 팀이 더 중요하다는 회사 차원의 결정이야. 겨우 막내 한 명 보내는 거로 불평하지 마.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과거의 나라면 A언어로 맞섰을 것이다.

"관례대로 팀 내에서 해결하시죠. 우리도 지금 인원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어제의 내가 아니었다.


"아, 안 그래도 저희 팀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배님, 우리 막내가 지금 다른 팀 지원업무 몇 가지를 맡고 있는데, 혹시 막내를 데려갈 때 그 업무도 좀 같이 가져가 주시면 안 될까요? 꼭 우리 팀이 안 해도 되는 일이거든요."


찰나, 그의 표정이 굳었다가 이내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이제는 내 눈에 그것이 보였다.

"그래, 오후에 회의 잡아서 같이 논의하자고."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예상치 못한 아군


오후 회의를 준비하던 중, 생각지도 못한 인물에게서 메신저가 왔다. 과거 나의 조언에 상처 입고, 결혼식에도 부르지 않았던 후배 A였다.


A: 선배님, 지금 대화 가능하신가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에게 나는 아직도 서슬 퍼런 칼잡이일 터였다. 우리는 옥상에서 만났다. 어색한 안부 인사가 오간 뒤, A가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A: 선배님, 갑자기 휴직자 나온 팀… 혹시 아세요? 제가 지금 그 팀에서 일해요.


나: 알지. 안 그래도 우리 팀에서 백업하게 생겼어. 그런데 어떻게 그 팀으로 간 거야?


A: 아… 제가 있던 팀 프로젝트가 얼마 전에 끝나면서 조직 개편이 좀 있었어요. 그때 이 팀으로 발령받았는데, 오자마자 이런 분위기라 저도 좀…


나: 맙소사. 하필이면.


A: 사실 휴직자가 생긴 게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팀장 때문에 다들 팀을 옮기거나 휴직하려는 분위기예요. 승진에서 두 번 미끄러지더니 눈이 돌아갔다고들…


A의 말에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상대 팀장은 합리적인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 팀장이 왜 그토록 무력하게 막내를 내줄 수밖에 없었는지, 김 선임이 왜 그토록 조급하게 나를 압박했는지. 그들은 지금 무너져 내리는 배 위에서 탈출하려는 것이다.


나: … 그렇구나.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었네. 난 그저 합리적으로 문제를 풀려고 했는데.


A: 김 선임님이 선배님 하고 나눈 이야기, 팀장님께 그대로 보고했나 봐요.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나: 고맙다, 정말. 같이 있을 때 잘해주지도 못했는데… 도움만 받네.


A: 아니에요, 선배. 이 팀에서 일하면서 선배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제가 오히려 고마웠다고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같이 일할 때, 많이 도와주셔서. 그땐 제가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갑자기 울컥, 하고 무언가 치밀어 올랐다. 애써 감정을 누르며 우리는 헤어졌다.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A의 마지막 말. '고마웠다'는 그 한마디가 내 마음속 굳어 있던 옹이 하나를 녹여 내렸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전혀 다른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이 배터리도 아닐진대, 그렇게 충전되고 교체될 수 있다니.


나는 사회는 불과 같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을 떠올렸다. 현명한 사람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에 손을 넣어 화상을 입는다. 나의 조언이라는 따뜻한 말은,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에 당시 A에게는 불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적당한 거리가 생긴 지금, 그 말은 온기가 되어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기기 위해 바짝 모여들었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서자 서로의 가시에 찔려 아파해야 했다. 그래서 다시 떨어졌다. 그러자 다시 추위가 몰려왔다. 고슴도치들은 이 두 가지 고통 사이를 오가다, 마침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찾아냈다. 나와 A의 이야기다.


불을 쬐는 기술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A의 경고대로라면, 나의 '합리적인 제안'은 미치광이에게 총을 겨누는 것과 같은 자살행위가 될 수 있었다. 서로를 동료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적당한 거리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임에 이기기 위해 참전했는데, 지금의 결론은 나를 희생하여 그들에게 '악의 없는 동료'임을 증명하거나, 혹은 또 다른 누군가(막내)를 희생시켜야만 끝나는 게임이었다. 막내가 그 엉망인 팀으로 간다면, 버티지 못할 것이 너무나도 확실했다.


머리로는 '안된다'라고 계속 외치는데,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A와의 대화로 충전된 내 마음이, 머리의 냉정한 계산을 무시하고 이상한 짓을 저질렀다. 나는 그대로 팀장의 자리로 걸어갔다.


"팀장님, 막내가 아니라 제가 저 팀으로 가겠습니다. 저 팀에 가서, 틈틈이 우리 팀 업무도 제가 백업하겠습니다."


미친 짓이다.


팀장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아내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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