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은 '이웃'을 사는 것

보병(Pawn), 강을 건너다

by 밑줄

선 넘은 오후


팀장의 얼굴이 붉게 일그러졌다. 통제되지 않는 목소리가 유리창을 울렸다. 회의실 밖 복도를 지나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멎는 것이 느껴졌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또다시 선을 넘었다.


그날 오후, 연락이 온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내 초임 시절 사수였던 법무팀 차 선배. 재테크에 성공해 취미로 회사를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한, 그래서 우리 기수 동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사람이었다. 옥상으로 올라오라는 짧은 용건이었다.


인생의 치트키, 차 선배


"황 프로, 오늘 회사에서 영화 한 편 찍었다며? 퇴장도 주인공처럼 아주 극적이었다고 소문이 자자해."


선배의 너스레는 여전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아무리 복잡한 사안도 보고서는 단 몇 줄로 끝냈다. 나머지는 업무 미팅과 말로 채웠다. 반면 나는 늘 불리한 선택을 했고, 보고서는 늘 이유를 설명하는 해명문이 되었다. 장점이 돋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늘 무언가 해명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내 이야기를 듣더니,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체스에서는 말이야, 상대편 진영 끝까지 도달한 보병(폰)을 여왕(퀸)으로 바꿔줘. 엄청난 보상이지. 그런데 문제가 있어. 그렇게 전진한 폰은 가장 먼저 상대의 공격 목표가 된다는 거야."


선문답 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가 지금 딱 그 꼴이야. 우직하게 폰처럼 일해서 퀸이 되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두들겨 맞는 것도 자네가 된 거지. 너무 애쓰지 마. 때로는 애쓰는 놈이 다 뒤집어쓰는 거야."


부동산은 이웃을 사는 것


선배의 말은 항상 그랬다. 내가 복잡한 논리와 절차의 성을 쌓아 올릴 때, 그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그 성을 무너뜨렸다. 과거 부동산 투자를 고민하던 내게 해준 조언이 떠올랐다.


"황 프로, 아파트는 그냥 남들이 좋다는 거 사면 돼. 왜인 줄 알아?"


"역세권, 학군, 브랜드… 뭐 그런 것들 때문 아닙니까?"


"물론 중요하지. 근데 본질은 그게 아니야. 부동산은 '이웃'을 사는 거야. 그냥 연예인이나 대기업 총수들을 봐. 돈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 그 사람들이 역세권이나 구조에 집착하는 것 봤어? 자기랑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의 가치를 사는 거지."


그의 말은 충격이었다. 나는 사회과학 서적까지 뒤져가며 도시 구조를 '프랙털 이론'으로 분석했다. 강남의 패턴이 어떻게 수도권과 지방으로 확장 적용되는지에 대한 글로 부동산 카페에서 제법 높은 순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차 선배는 나의 그 모든 분석을 '돈 많은 연예인 사는 동네'라는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렸다. 허탈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의 본질은 때로 이렇게 무식할 정도로 단순했다.


그렇다면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선배의 조언은 비수처럼 날아와 오늘 내 문제의 정곡을 찔렀다. 나는 이번에도 나만의 원칙과 명분을 내세우며 복잡하게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선배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다시 보니,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지금 내가 주목해야 할 '이웃'은 누구인가. 나와 막내, 우리 팀장이 아니었다. 핵심 변수는 상대 팀의 '팀장'이었다. 무능한 이웃이 동네 전체의 집값을 떨어뜨리듯, 그의 잘못된 리더십이 우리 팀의 가치까지 훼손하고 있었다. 이건 우리 팀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이웃'을 만난 일시적인 가치 하락이었다.


퀸이 될 것인가, 폰으로 남을 것인가


차 선배의 체스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왜 항상 '해명하는 사람'으로 살았을까. 실력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어려움을 내가 떠안고, 문제를 해결하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사람, 즉 '퀸'이 되고 싶었다. 어쩌면 문제의 본질은 그 팀장이 아니라, 완벽한 퀸이 되어 더는 해명하고 싶지 않았던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졌다. 퇴근해서 아내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나는 막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잠깐 시간 괜찮아?"

이전 08화고슴도치를 끌어안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