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일 차
난 26년 차 현직 초등학교 교사다. 갑자기 내 이력을 밝히는 이유는 조금 전에 집을 나서다 한 이웃을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눴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는 내가 교대를 다니던 때의 같은 과 동기 여학생이다. 하긴 이제 더는 여학생이란 지칭이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늘어나버린 내 이마의 주름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여자라면 다른 건 다 숨겨도 결코 감출 수 없다는 그녀의 손등과 목주름을 볼 때마다 다른 이유에서 서글픔이 밀려든다. 그녀나 나나 어느새 퇴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32년 전,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니던 대학교를 때려치웠다. 1년을 꼬박 대학생활을 했지만, 아무런 보람이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적성이 맞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재수를 결심했다. 물론 부모님 입장에선 멀쩡하게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수험생으로 돌아가겠다는 내 결정이 못마땅하셨을 터였다. 대학만 들어가면 다시는 그 끔찍했던 때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 믿었건만, 역시 사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1년 만에 대입 시험을 준비한다는 것도, 어디에 소속된 일 없이 집과 종합반 학원을 다니면서 혼자 묵묵히 공부한다는 것도 내게는 꽤 버거운 일이었다.
이름도 없는 무늬만 4년제인 학교를 다니다 명색이 교대에 입학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가 다녔던 그 학교는 요즘 시쳇말로 거론하는 '지잡대'라는 명칭이 딱 알맞은 그런 학교였다. 학생의 수준이나 교수진도 애매했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졸업해 봤자 취업을 장담하기도 어려운 학교였다. 미련 없이 박차고 나왔다고 해서 한때는 내 모교가 될 뻔했던 그 학교를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다. 그만큼 그때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앞으로 뭘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따위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도 답할 수 없는 처지였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부모님에게 큰 효도를 한 셈이었다. 국립대라는 명분도 당신들에겐 크게 작용했을 테고, 무엇보다도 타 대학교의 절반도 안 되는 등록금을 내고 다니게 되었으니 당신들은 아들의 새 출발이 퍽 자랑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사, 즉 공무원이 되니 아들이 장래에 뭘 하면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나는 그러질 못 했다. 다들 내게 배가 불러서, 호강에 겨워서 요강에 똥 싸는 소리나 하고 있다며 손가락질해 댔다.
새로운 꿈을 안고 새 환경에 첫 발을 내디딘 그날, 무려 32년 전의 그날을, 방금 전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동기생이 떠올리게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아파트 밖으로 나가는 채 3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우린 32년 전의 새내기가 되어 있었다. 둘 다 말로 표현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참 많이 늙었구나 하는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 꿈 많고 좋았던 시절은 다 어디로 가고 결국 우리가 여기까지 와 버렸네.'
아마 그런 말도 하지 않았을까?
잘 살고 싶다는 다짐은,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교대에 갓 입학한 뒤부터 한시도 멈춘 적이 없었다. 이렇게도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그 긴 세월을 살아왔건만 지금의 나는 다시 스물두 살의 그 상태로 돌아간 것 같다.
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고 또 물어보곤 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게 맞냐고,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냐고 끊임없이 묻는다. 정작 살아가는 건 나인데도 나는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또 이렇게 물어보게 된다.
'그러면 너는 도대체 그동안 뭘 한 거냐?'
며칠 전 아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앞으로 많이 살아봤자 30년쯤 남지 않았을까,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래도 평균수명의 허들을 우리가 넘을 확률은 높지 않을 테다.
"당신은 40년, 나는 30년!'"
남자보다 여자가 8년쯤 더 사는 현실을 감안해 한 답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렇게 말해 놓고도 내가 먼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남은 30년의 세월이라는 길이감이, 지나온 54년의 무게감에 눌려버린 탓이겠다.
"혹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마지막에 내 동기생과 헤어지면서 물었다. 그렇다 혹은 아니다는 언급 없이 그녀는 미소로 답했다. 참 많은 뜻이 담긴 미소였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린 남은 삼사십 년이라도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