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읍성 청허정으로 향하는 길목
과거를 걷는 108 계단 그리고 청허정
(해미읍성 청허정으로 향하는 길목)
108개의 돌계단이 묵묵히 서 있다.
이 계단은 단순히 위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잇는 시간의 통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잊혔던 옛이야기들이 속삭이듯 들려오는 듯하다.
계단 아래서 올려다본 청허정은
아스라이 멀게만 느껴진다.
마치 500년이라는 세월이 쌓인 높이처럼.
계단을 오르기 전, 안내판에 적힌
'청허(淸虛)'라는 두 글자가 눈에 띈다.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이라니, 어쩌면 이 계단은 단순한 경치 감상을 위한 길이 아니라, 마음을 정화하는 수행의 길이 아니었을까. 숨을 고르며 한 계단씩 오른다.
현대의 분주한 삶 속에서 흩어졌던 마음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맞춰지는 듯하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잊고 지냈던 내면의 고요함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고개를 들면 푸른 하늘과 초록빛 잔디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문득 과거의 문인들이 이 길을 오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해 본다.
시대를 풍미했던 문인들, 조위와 이경전 같은 이들이 이곳에서 시름을 잊고 풍류를 즐겼으리라. 그들은 이 계단을 오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108개의 계단이 상징하는 번뇌를 하나씩 내려놓으며,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청허정에 다다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침내 마지막 계단에 다다르자, 청허정이 그 위용을 드러낸다. 해 질 녘 노을빛을 받은 정자는 더욱 깊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붉은 기둥과 화려한 단청은 마치 과거의 화려한 연회를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 올라서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단순한 전경이 아니다. 천수만과 드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서, 나는 과거의 시인들이 보았던 그 풍경을 마주한다.
그들은 이곳에서 시를 읊으며 어떤 감흥을 느꼈을까.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진정한
'청허'의 경지에 이르렀으리라.
현재의 청허정은 2011년에 복원된 곳이지만, 그 자리에 서면 500년 전의 역사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일제강점기에 신사가 세워졌다는 아픈 역사 또한 이 땅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복원된 정자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비록 그때 그 정자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서서 맑은 마음으로 시를 읊었던 선조들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듯하다.
낮의 푸른 하늘 아래 청허정은 굳건한 역사적 건축물로 서 있지만, 해가 진 후 조명이 켜진 청허정은 또 다른 매력을 뽐낸다.
화려한 단청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밤하늘 아래 조용히 서 있는 정자를 바라보며, 나는 시간의 흐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곳에 서서 천수만을 바라보며, 과거의 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 한 구절을 읊어본다.
나의 시는 비록 그들의 시처럼 유려하진 않겠지만, 500년의 시간을 넘어 전해져 온 청허의 정신만큼은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108 계단을 오르며 마음의 번뇌를 씻어내고, 청허정 위에서 맑은 마음을 얻은 하루였다.
이 길은 단지 해미읍성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었다.
과거의 흔적을 밟으며,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의 나를 그려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청허정은 단순히 아름다운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맑게 비추는 거울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