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tak 부족
싸우자는 건가 싶은 엄마와의 첫 만남
유치원 학부모 모임에서였다. 한 엄마가 입을 열자마자, 내 머릿속은 번개처럼 스쳤다.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목소리는 크고, 말투는 단도직입. 나는 순간적으로 방어 태세를 갖췄다. 혹시라도 싸움이 나면 아이 앞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
그런데 가만 들어보니 싸울 기미는 전혀 없었다. 그냥 그분의 평소 톤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자바 섬, 즉 자카르타 사람들은 수줍고 조용해서 꼭 하고 싶은 말도 ‘빙빙 돌려서’ 표현하곤 한다. 그래서 늘 답답하다고 느껴왔는데, 이 엄마는 정반대. “뭐지? 저 당당함은?”
나중에 친구들에게 물으니 돌아온 답변은 간단했다.
“오랑 바탁(Orang Batak 바탁 사람)이니까 그렇지.”
바탁 지역 사람과 자바 지역 사람,
같은 나라 사람 다른 느낌
바탁(Batak) 사람들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북부, 토바 호수(Lake Toba)와 그 주변에서 살아온 민족이다. Karo, Toba, Mandailing, Simalungun 등 다양한 하위 그룹이 있는데, 하나같이 에너지가 넘치고 목소리가 크다.
반면 자바(Java) 사람들은 오랜 왕국 문화 속에서 살아오며, 조화와 예의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말투부터 표정, 심지어 몸짓까지 부드럽다. 같은 인도네시아라고 해도 두 집단을 만나면 “아, 이래서 민족성이란 게 있구나” 하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목소리 크기의 기원 – 또바 호수의 메가폰
Batak 사람들의 큰 목소리는 단순히 성격 탓이 아니다. 고향인 또바 호수는 언덕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다. 멀리 떨어진 사람에게 “저녁 먹어라!”라고 외치려면 자연스럽게 성대를 풀가동 해야 했다. 마이크도 없던 시절, 목소리 자체가 메가폰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지금도 목소리가 큰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작은 목소리는
“왜 속을 숨겨?”라는 신호일 수 있다.
감정 표현, 직설이 미덕
Batak 사람들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걸 좋아한다. “기뻐!” 하면 진짜로 소리 내어 웃고, “싫어!” 하면 숨기지 않고 말한다. 이 솔직함은 무례가 아니라 진정성의 상징이다.
반면 Java 사람들은 갈등을 피하려고 우회적으로 표현한다. ‘싫다’는 말 대신 “나중에 생각해 보자” 같은 돌려 말하기를 즐겨 쓴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이런 화법이 상대방을 존중하는 방식이지만, Batak 사람들에게는 “왜 이렇게 답답하게 말해?”라는 반응을 유발한다.
“화났어?” vs “답답해!”
이 차이는 실제로 많은 오해를 만든다. Java 사람들은 Batak의 직설을 듣고 “저 사람 지금 화난 거 아니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Batak 사람들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그냥 대화하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Batak은 자바인의 완곡한 표현을 들으며 “저 사람은 도대체 속마음을 왜 말 안 해? 뭐 숨기는 거 아냐?”라고 의심한다. 이렇게 오해가 꼬리를 물지만, 사실은 단순히 문화적 차이일 뿐이다.
두 문화의 장단점
Batak 스타일의 장점은 확실하다. 명확하고 솔직하다. 감정 표현이 풍부하다. 공동체 결속력이 강하다. “내가 널 사랑해!”라고 큰소리로 말해주는 사람이 바로 Batak이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직설적인 표현이 거칠게 들린다. “왜 이렇게 퉁명스러워?”라는 오해가 쉽게 생긴다.
Java 스타일은 반대로 부드럽고 세련됐다. 조화를 중시하고, 상대방의 체면을 세워주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돌려 말하다 보니 의사소통이 불명확해질 때가 있다는 점.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라는 질문이 저절로 튀어나올 수 있다.
같은 나라, 다른 결
Batak과 자바 사람들의 차이는 결국 같은 인도네시아 안에서 만들어진 ‘다른 결’이다. Batak의 목소리는 수마트라의 울창한 숲과 호수에서 자라났고, Java의 낮은 톤은 오랜 왕국 문화와 농경 사회의 질서 속에서 빚어졌다.
자카르타라는 대도시에서 두 문화가 부딪힐 때, 처음엔 낯설고 충돌도 생기지만 결국 서로에게 배우는 점이 생긴다. Batak의 솔직함은 대화의 힘을 알려주고, Java의 완곡함은 배려의 지혜를 가르쳐준다.
그날 유치원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Batak 엄마. 처음에는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거야?”라고 느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그녀의 당당함은 화가 아니라 솔직함이었고, 그 속에는 따뜻한 진심이 있었다.
Java의 조용함과 Batak의 직설은 서로 다른 색깔일 뿐, 둘 다 인도네시아라는 거대한 그림을 완성하는 중요한 퍼즐 조각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모임에서도 누가 목소리를 높여도 더 이상 움찔하지 않는다.
“아, 바탁 스타일이구나!”
하고 웃을 수 있게 됐으니까.
by 23년 차, 자카르타 언니
참고 자료
Medium
Mengapa Orang Batak Cenderung Berbicara dengan Suara Keras
Universitas Petra
Gaya Komunikasi Batak
ResearchGate
Perbedaan Komunikasi Etnis Batak dan Jawa
Wikipedia
Orang Bata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