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산을 함께 걷다.
휴가철의 아침이었다.
커튼 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방 안을 부드럽게 덮고 있었다. 책을 읽으며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던 그때, 전화가 울렸다.
“나 지금 좀 먼 데 있는데, ‘아시클로버’ 좀 가져다줄 수 있어?”
선배였다.
“어딘데요? 직접 구매하면 되잖아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잠시의 정적 뒤, 그의 대답.
“지리산 중턱.”
“…엥?”
놀란 숨이 새어 나왔다.
“얼른 버스 타면 올 수 있어.
등산화 신고, 약 챙겨 와.”
그의 목소리는 장난이 아니었다.
휴가 중인 걸 아는 선배의 부탁이라, 결국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버스에 앉아 몇 시간을 달리는 동안, 창밖엔 가을빛이 묻은 도로가 이어졌다. 산이 가까워질수록 숲이 금빛으로 흔들리고, 구름은 낮게 흘러내렸다. 햇살이 나뭇잎에 닿을 때마다 단풍이 반짝였다.
태어나 처음 본 지리산은 멀리서도 장엄했고, 이상하게 마음을 작게 만드는 산이었다.
도착한 곳은 낡은 숙소였다. 저녁빛이 어둑하게 깔려, 공기가 차가웠다.
그는 운동복 바지 입은 동네 아저씨처럼 나와 나를 반기며 보자마자 물었다.
“가져왔어?”
그의 입술엔 군집성 수포가 번져 있었다.
“이걸로 날 여기까지 불렀어요?”
내가 투덜대듯 말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얼마나 불편한 줄 알아…”
그러고는 방으로 데려갔다. 구석에서 뭔가 꺼내려하는 뒷모습은 마치 곰아저씨 같았다.
고구마를 꺼내더니,
“먹어봐. 맛있어.”
하고 내밀었다.
그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고구마의 김이 천천히 피어올라 방 안 공기가 달고 따뜻해졌다.
———
큰 침대 하나뿐인 방.
우리는 등을 돌리고 누웠다. 민망한 공기가 흐르고, 그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변해갔다. 나는 살금살금 바닥으로 내려가려던 참이었다.
낮은 목소리가 어둠을 뚫었다.
“야, 내일 지리산 등반 엄청 힘들 텐데, 잠 못 자서 힘들다고 중간에 내려가자 하면, 진짜 다시는 너 안 본다. 얼른 올라와.”
“……네.”
나는 침대 끝에 매달린 채 조용히 잠을 청했다.
⸻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달빛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능선 위로 엷은 구름이 걸려 있었다. 숲은 은은한 수분이 가득 차 초록빛, 단풍빛의 바닷속 같았다.
초콜릿과 물이 담긴 작은 배낭을 메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빠르게 걸었고, 나는 숨이 차올랐다.
그가 다가와 내 목을 문질러 쓰다듬으며 말했다.
“호흡 조절. 천천히 해.”
그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작은 불씨가 번지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선크림을 내밀었다.
“발라줘.”
두 번째지만 그의 피부에 손이 닿을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흘렀다.
산길은 길었고, 가을 지리산은 그 계절의 냄새로 가득했다. 젖은 낙엽, 솔잎의 송진, 흙 위로 번지는 햇빛. 바람은 부드럽게 뺨을 스쳤고 멀리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듯한 소리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네가 그 사람 못 잊는 거 알아.
근데 혹시라도 내가 그 사람 사진 보게 하진 마.
네 마음속 빈자리는 내가 천천히 채워갈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람에 실린 냄새만 맡았다.
흙, 땀, 그리고 어쩐지 슬픈 냄새.
⸻
휴게소에서 그는 컵라면을 꺼냈다.
“여기서 너랑 먹는 라면, 알프스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다.”
나는 웃었다.
정상에 도착하자,
구름이 아래로 밀려나며 푸른 산맥이 끝없이 펼쳐졌다. 단풍은 금빛과 붉은빛으로 타오르고 그 사이로 햇살이 부서졌다.
그가 사진 한 장을 찍자고 했다.
아까부터 동네산 오르듯 가파른 바위산을 휘리릭 뛰어오르던 아저씨께 핸드폰을 맡기고, 계속 나를 절벽 끝으로 이끌었다.
“여기까지 와야 잘 나와.”
붉은 구름 사이로 빛이 부서졌다. 그 순간의 바람은 따뜻했고 산 전체가 숨을 쉬는 듯했다.
내려오는 길,
그는 내 어깨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사실 사진 찍는 척하고, 너 안고 뛰어내릴까 했어.”
깜짝 놀라서 쳐다보며 말했다.
“뭐라고요?!”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나만 사랑하게.”
웃었지만,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와호장룡’을 감명 깊게 보셨나 생각하던 찰나,
발이 미끄러졌다.
그는 나를 붙잡으며 화를 냈다.
“제대로 안 보고 내려오면 어떡하냐.”
그러면서 자신이 아끼는 스카프를 풀어 내 발목을 단단히 묶고 나를 업었다.
그의 등의 온기가 포근했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없었다.
석양빛이 돌아오는 버스 유리창에 스며들었다.
가을 지리산의 단풍이 저 멀리 타오르고, 그 사이로 흩어지는 빛이 한 계절의 끝을 조용히 봉인하는 듯했다.
서른 번째 조각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의 하루에도 작은 빛 하나 스며들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