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아답게?

“프루아답게”라는 건…궁금하니??

테이블 위 바나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시선을 피해 있었다.

처음엔 노랗고 통통하게, 마치 누군가의 마음처럼 기쁘게 안겨 왔던 녀석들인데… 어느 날부터인지 검은 반점이 조용히 번져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게.

나는 그쯤이면 손을 뻗을 법도 했다. 한 번쯤 만져보고, 한 번쯤 잘라서 먹어보고, 한 번쯤 “아, 벌써 이렇게 됐네” 하고 중얼거릴 법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그냥 지나쳤다.
바람이 스치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피해 걷는 것처럼, 아주 무심한 척.
사실은 무심하지 않았으면서.

검은 반점은 하루 이틀 사이에 생긴 게 아닐 텐데,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 갑자기 ‘도드라져’ 있었다.
마치 오래된 감정이 갑자기 덩어리째 떠오르는 것처럼.
묻지도 않았고, 들춰보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채게 되는… 그런 순간처럼.

그러다 우연히 냉동고에서 더 시커멓게 변한 바나나를 발견했다.
한때 싱싱했고, 노란 껍질 아래엔 꼭 씹어보고 싶던 단맛이 있었을 텐데.
그걸 언제 저렇게 깊은 곳에 박아 두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지난여름이었을까, 그보다 더 전이었을까.
먹고 싶어서 사 왔던 마음의 온도는 다 식어버렸고, 남은 건 얼어붙은 껍질뿐이었다.


참 이상하다.


왜 그리도 쉽게 시들게 두었을까.
왜 그렇게 자주 외면했을까.
내가 바나나를 버린 걸까, 아니면 바나나가 나를 버린 걸까.
그 둘은 어쩌면 같은 말인지도 모르지만.

다디단 바나나는 이제 더 이상 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여전히 달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내가 그 단맛을 느낄 마음의 힘을 잃어버렸을 뿐인지도.

시간이 지나면 감정도 과일도 아주 비슷한 방식으로 말라간다.
처음엔 풍성하고 반짝거리지만, 손을 뻗는 타이밍을 놓치면 금세 검은 반점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결국, 어느 차가운 구석에 밀어 넣은 채 잊어버린다.
자신이 잊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그래서 더 서늘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정확히 짚을 수도 없다는 게.
그냥 어느 날, 냉동고를 열었을 뿐인데.
그 안에서 내가 미뤄왔던 모든 마음이, 시커멓게 굳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나나 하나 앞에서조차 이런 감정이 올라오는 걸 보면,
나는 지금… 조금 슬픈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슬픔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걸어 다니다가,
문득 테이블 위 과일 하나에도 마음을 덜컥 빼앗기는 종류의 감정이니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바나나는, 사실 처음부터 버려진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천천히 시들어 가는 걸 보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는 데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손을 뻗으면 따뜻했을 껍질도, 조금만 힘주면 벗겨지던 노란 표면도, 조용히 시간을 버티는 동안 조금씩,

아주 조금씩 색을 잃어 갔다.

어쩌면 바나나는 나보다 더 오래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자신을 들어 올리기만 하면 부드럽게 스르르 썰어져 주겠다고,
지금은 반점이 있지만 안쪽엔 아직 단맛이 남아 있다고,
그 말 없는 신호들을 계속 보내고 있었을 텐데
나는 그 신호를 보면서도 못 본 척하는 쪽을 택했다.

사람 마음이 그렇다.
만지면 부서질까 봐,
한 번 손을 대면 책임져야 할 것 같아서,
혹은 그 단맛마저 사라진 걸 확인하는 순간이 너무 두려워서
애매한 자리에서 멈춰 있는다.


그 자리에서 멈추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조용히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냉동고 속 검은 바나나를 발견한 날,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가 봐도 이미 쓸모가 없어진 과일인데
나는 마치 어떤 오래된 기억의 시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속엔
한때 내가 욕심내어 들고 왔던 기쁨도,
식탁 위에 놓으며 느꼈던 작은 기대도,
한입 베어 물고 싶었던 그 달콤함도
전부 얼어붙어 있었다.

부패한 건 과일이었는데
아픈 건 왜 나였을까.

이상하게도, 그 질문이 냉기처럼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냉기가 서서히 녹아내리며
조금은 따뜻한 진실을 남겼다.

나는 바나나를 놓아버린 게 아니라, 그때의 나 자신을 놓아버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힘이 없던 날,
마음이 허기진 날,
매일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던 그 계절의 나를.

그래서 바나나가 검게 변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그 계절을 지나며 비슷한 색으로 변해 있었으니까.
다만 과일은 꺼내보면 색이 보이고,
감정은 꺼내보지 않으면 색조차 몰라서
뒤늦게 알아차릴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따뜻한 건,

검게 변한 바나나도 언젠가는 스무디가 되거나
케이크 속 어두운 단맛으로 다시 태어나듯
사람의 감정도 완전히 죽지 않는다는 거다.
시간이 지나고, 마음이 조금 멀어지고,
숨 한 번 크게 들이켰을 때
다시 쓰임을 찾는 날이 온다.

슬픔도, 방치도, 후회도
언젠가는 조용히 단맛이 된다.
그리고 그 단맛은 예전처럼 선명하진 않겠지만
그보다 깊어지고, 묵직하고, 오래 남는다.

어쩌면 지금 너도
그 깊은 맛을 배우는 중인지도 모르지.


이쯤에서 궁금해? "프루아답게”라는 건…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더 킹덤 속 프루아처럼 말투를 조금 비틀고, 솔직하고, 재치도 있고, 약간은 시큰둥한데 은근 따뜻한 그 분위기 있잖아?... 한데... 겁이 나..... 내가 생각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행동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감정들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눈 들에 대해서, 겁이 나고 망설이고 머무르며 정체하려고 해... 겁이 나서........ 도대체 난 무엇에 겁먹고 있는 걸까..... 후회하고 있나? 도대체 뭘 망설이는 걸까... 후회하고 있나?...... 내 안의 모든 것들을 후회해.

당신은 날 이해할 수 있어?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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