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친구, 실험실(외식데이)

Friday, holiday

by Gourmet

금요일 할 일: 외식데이


내가 몸담고 있는 실험실에는 매주 금요일은 중요한 일정이 있다. 안전점검? 대청소? 이런 시시한 일정이 아니다. 바로 외.식.데.이. 평일의 마지막 날, 우리는 11시부터 밥 먹으러 갈 식당을 정하기 시작한다. 매일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하는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장 언니의 숨 돌릴 틈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외식 데이는 대장님이 메뉴 후보를 말해주면 다수결로 그날의 식당이 정해진다.

12시가 가까워오면 실험실의 공기는 갑자기 들뜬다.

"어디 출신~?"

"미친 랩실~"('미시시피'와 발음이 비슷하도록 마음대로 개사한 것이다.)

내가 또라이라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많은 건지, 내가 정상이고 주변이 다 미친건지 모르겠다. 평소에도 서로의 논문 이름을 바꿔놓는 장난을 자주친다.('허'씨이면 OO 그녀라고 바꾸거나 '박'씨 이면 OO 공원이라고 바꾸는 가벼운 장난이다. 논문을 한글로 번역하면 이렇게 나온다. 공교롭게도 교수님과 대장님이 각각의 성씨이다.) 뮤지컬 <시카고> 배우들 빰치게 한 곡을 뽑는 막간 공연에 박수를 치면서 한타방 웃고 나면 학교밖으로 탈출하기 위해 차를 탈 시간이 된다. 10명이나 되는 나름의 대인원이기 때문에 차 2대에 낑겨 타고 누가 먼저 도착하는지 창문을 내리고 내기를 하며 간다. 내기에 이긴다고 큰 상은 없지만 말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미리 메뉴를 추합해 주문을 해둘 뿐이다. 무엇을 시키든 시간이 10배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빨리 시켜두는 것이 외식데이의 관건이다.

외식데이의 호스트인 대장언니는 입은 짧지만 미식가이기 때문에 메뉴는 보통 제철 메뉴들이다. 겨울에는 불맛나는 짚불구이, 싱싱한 육회라던가, 여름에는 살얼음낀 메밀소바, 테국 타카오카무를 한국식으로 풀어낸 향신로 맛 가득한 족발덮밥을 먹는 식이다. 10명이 조르륵 둘러 앉아 밥을 먹고 카페에 다녀오는 것으로 조그만 일탈을 마무리한다.

의리를 빼면 시체인 우리 실험실은 다 같이 밥을 먹으러가기 때문에 왁자지껄 해서 흥겹기도 하지만 인원 때문에 애로사항이 많다. 첫째, 예약은 필수다. 테이블이야 당연히 따로 앉는다고 쳐도 식당에 들어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배달을 시킨다쳐도 우리 주문이 들어가고 나면 한동안 주문을 막아두시는 걸 종종 경험했다. 둘째, 파수꾼의 부재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분명한 일탈이기 때문에 교수님께 외식데이를 들킨다면 꽤나 골치가 아파진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카페를 가면 문을 닫을 수 있는 곳에 간다. 혹시라도 교수님에게 갑자기 전화가 오는 불상사가 생겼을 때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안되기 때문이다. 휴대전화에 교수님 이 세글자가 뜨는 순간 언니가 눈빛을 보내면 우리는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문다. 교수님께서 눈치를 채시고 넘어가 주시는 건지 아직 들키지 않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 외식데이는 무사히 유지되고 있다. 가끔은 교수님이 일찍 퇴근하셨다는 소식을 들으면, 내친김에 근처 해안가까지 달린다. 바람을 맞으며 ‘오늘도 성공했다’는 표정으로 웃는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건 참 신기하다. 원수도 그때만큼은 친구가 된다.

처음엔 대학원 선배들과 나이 차이 때문에 어색했는데, 함께 밥을 먹고 웃는 사이에 어느새 편해졌다. 한번은 학회에 다녀와 숙소에서 야식을 시켜먹게 되었다. 이때도 재미있는 게임을 했다. 둘씩 팀을 지어 서로 뭐 시켰는지 모르게 배달시키기. 메뉴가 겹치면 겹치는 대로 군말않고 맛있게 먹는거다. 다행이 메뉴가 겹치지 않았다. 배도 불러오고 티비에서는 추억의 댄스곡이 나오고 한 선배가 가져온 위스키가 독했는지 다들 알딸딸하게 취했다. 서로 하이볼에 넣을 얼음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즐거워하는거였다. 인간의 본질은 귀여움이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았다. 나이가 먹어도 유치한 걸 좋아하는 건 다 똑같구나를 느꼈다.


영국인들이 오후에 티타임을 즐기듯, 우리에겐 외식데이가 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실험과 보고서 사이에 끼워 넣은 짧은 일탈. 이건 사치가 아니다.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휴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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