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내는 개척자
그때 그 시절 상식: 1994학년도 첫 수능과 입시 지옥
1. 단군 이래 최대의 실험, '수능 2회 실시'
역사상 유일무이: 1994학년도 대입(1993년 시행)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능을 두 번(8월, 11월) 치른 해였습니다. 두 번 시험을 보고 그중 좋은 성적을 선택해서 제출하는 방식이었죠. 8월의 찜통더위: 1차 수능이 8월 20일 한여름에 치러졌습니다. 에어컨이 없는 학교가 대부분이라, 창문을 열면 매미 소리와 소음이, 닫으면 찜통더위가 수험생을 괴롭혔습니다.
2. 저주받은 94학번과 '눈치작전'
본고사의 공포: 주요 명문대들이 국·영·수 위주의 지필고사인 '본고사'를 부활시켰습니다. 하지만 모든 대학이 본고사를 본 것은 아니어서, 수험생들은 [본고사 대학 vs 비본고사 대학] 사이에서 치열한 눈치작전을 펼쳐야 했습니다.
3. 듣기 평가의 충격
방송 사고: 학력고사 때는 없던 '언어(국어)/외국어(영어) 듣기 평가'가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학교 방송 시설이 열악해 소리가 울리거나 잡음이 섞여 나오는 경우가 많아 수험생들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4. 엿과 찹쌀떡
합격 기원: 교문 앞 철제문에 엿이나 찹쌀떡을 붙여놓고 자녀의 합격을 비는 부모님들의 간절한 모습은 뉴스 단골 소재였습니다. "철썩 붙어라"는 의미였죠.
'수능 한파'라는 말은 지금 공공연하게 쓰이고 있지만, '수능 찜통더위'는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희수는 수능 1세대이자 실험용 쥐가 되었던, 단군 이래 최초로 한 해에 입시 시험을 두 번 본 세대이다. 1975년 3월 1일생부터 1976년 2월 29일 사이에 태어난 이들, 일명 '저주받은 94학번'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물론 재수생들도 포함해서 말이다.
'정답이 없어도 길은 있다. - 강윤수 선생님'
1992년 12월, 새로운 입시제도가 발표된 직후 우리들은 거대한 혼돈에 빠졌다.
"수학능력시험? 수학(Math)을 못하는데 수학만 본다고? 너무한 거 아니야?"
뼛속까지 수포자(수학 포기자)인 희수는 멘탈이 바사삭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알고 보니 대학수학능력시험(大學修學能力試驗).
대학에 가서 학업을 닦을(修學) 수 있는 능력을 보는 시험이었다. 단순히 암기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사고 능력'을 중요시하는 시험이라나?
1993년 여름, 고등학교 3학년 교실.
그해 희수의 교실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칠판에는 'D-DAY'가 두 개나 적혀 있었다.
[1차: 8월 20일 / 2차: 11월 16일]
"야, 누구는 본고사 준비하러 학원 간다는데, 우린 어쩌냐?"
"난 본고사 없는 대학으로 갈 거야. 수능만 파기도 벅찬데 무슨 본고사야."
불과 1년 전 선배들까지만 해도 <성문 종합 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달달 외우면 대학에 갔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제도가 도입됐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부 대학은 '본고사'까지 본다고 했다.
암기냐, 사고력이냐, 아니면 지필고사냐. 우리는 대한민국 입시 역사상 가장 거대한 미로에 갇힌 흰 쥐였다.
희수는 모의고사 성적표를 구겨버리고 싶었다. 점수는 널뛰기를 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본고사를 준비할 실력은 안 되고, 수능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대학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야간자율학습 시간.
희수는 충동적으로 가방을 쌌다. 오락실이나 가서 '스트리트 파이터'나 한 판 때리고 싶었다. 뒷문으로 살금살금 나가려던 찰나,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왔다.
"유희수. 가방 메고 어디 가냐? 달밤에 체조하러 가냐?"
3학년 담임, 강윤수 선생님이었다.
희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만 해도 '사랑의 매'라는 명분 하에 구타가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불호령과 함께 체벌이 날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희수를 교무실이 아닌 학교 벤치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시원한 음료수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오렌지색 '환타' 음료는 그 당시에도 귀한 음료였다.
"마셔라. 머리라도 좀 식히게."
"......"
"많이 힘들지? 나도 힘들다. 선생 20년 넘게 했는데, 교과서에도 없는 걸 가르치려니 나도 죽겠다."
선생님의 뜻밖의 고백에 희수가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셨다.
"희수야. 남들 본고사 한다고 기죽지 마라. 넌 네가 잘하는 걸로 가면 된다."
"제가 잘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어요. 수능 문제는 답이 안 보여요."
"너희가 살아갈 세상도 그럴 거야. 교과서에 없는 문제들이 쏟아질 거다. 그때마다 도망칠래? 정해진 답이 안 보이면, 네가 길을 만들면 되는 거야. 넌 깡다구도 있고 심지도 굳은 놈이니까, 네 방식대로 풀어내면 된다."
선생님은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희수의 노트 한구석에 무언가를 적어주셨다.
[정답이 없어도 길은 있다.]
"가서 공부해라. 도망가지 말고. 한번 더 도망치다 걸리면 그 순간 너의 엉덩이는 너의 것이 아니다. 허허"
그날 밤, 희수는 오락실 대신 다시 교실로 돌아와 문제집을 펼쳤다. 물론 엉덩이를 지켜야 한다는 또 다른 미션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의 엉덩이는 소중하니까.'
그는 본고사는 과감히 포기하고, 오직 수능 하나만 파기로 마음먹었다. 선생님의 글귀를 부적처럼 쥐고서 말이다.
희수는 무작정 정답을 외워서 찍기보다는, 정답에 근접한 방법을 찾아가기 위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 영역이 대표적이었다. 기존 학력고사가 문법적으로 틀린 것을 찾거나 단어를 암기해서 해석만 잘하면 되는 문제였다면, 수능은 달랐다. 영어 지문을 읽고 '필자의 의도'를 파악하거나 '감정 상태'를 묻는 문제가 많았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외국인과 대화할 때도 그 사람의 감정과 의도에 따라 말의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가. 의도와 감정을 무시하고 사전적 의미로만 해석하면 소통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래, 이건 소통이다. 출제자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듣는 거야.'
희수는 펜을 굴리며 지문을 다시 읽어 내려갔다. 예전엔 보이지 않던 '맥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1993년 8월 20일.
대망의 제1차 수능 날. 날씨는 잔인할 정도로 맑고 뜨거웠다. 에어컨도 없는 교실에서 부채질해 가며 풀어낸 언어 영역과 수리탐구 영역. 듣기 평가 시간에는 스피커 잡음이 섞여 나왔고, 문제는 난해했지만 희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만의 답을 찾겠다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11월 2차 수능까지 치른 후 받아 든 성적표는 희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점수에 맞춰 지방 4년제 대학도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희수는 그러지 않았다.
희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도전'을 선택했다.
"어차피 남들보다 1년 더 빨리 들어왔으니 1년 다시 제대로 도전해 보자."
그리고 다음 해인 1994년, 희수는 자신이 진짜 배우고 싶은 분야를 전문적으로 파고들 수 있는 대학을 목표로 다시 펜을 잡았다.
도서관 구석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치열하게 보낸 1년.
선생님이 주셨던 [정답이 없어도 길은 있다]는 메모가 희수의 책상 머리맡에서 1년 내내 그를 지탱해 준 등대였다.
그리고 1994년 겨울.
희수는 마침내 원하던 2년제 대학의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었다. 그는 2년제 갈 거면 왜 재수했냐는 비아냥을 받아들였고, 비록 남들이 알아주는 명문대는 아니었지만, 희수에게는 그 어떤 합격증보다 빛나는 '나만의 길'이었다.
수능 1, 2차 시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러지고는, 많은 문제점과 부작용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1세대 선배들의 그런 실험정신과 희생정신 덕분에, 그다음 치러진 수능부터는 점점 자리를 잡아갔고 30여 년 동안 유지되고 있다.
그렇게 아무도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걸어간 희수에게는 그 첫 시험이 거대한 시련이었겠지만, 담임 선생님의 따뜻한 배려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0여 년이 지난 어느 명절날.
은사님을 만나러 가는 희수와 함께 동행한 예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희수는 양손 가득 선물세트를 들고 현관문 앞에 섰다.
초인종을 누르자 머리가 희끗희끗한 선생님이 반갑게 문을 활짝 열어주셨다.
"선생님... 아니 아버님. 저희 왔습니다."
희수를 반갑게 맞아 준 선생님은 다름 아닌 희수의 부인 예진의 아버지, 즉 장인어른이었다.
"아빠. 나 왔어."
"그래, 우리 딸하고 사위 왔는가? 어서들 들어오게. 피곤했지?"
식사 후 식탁에 둘러앉아 소주한잔을 기울이는 시간, 희수는 빳빳하게 코팅된 메모지 한장을 꺼내 식탁위에 올려 놓았다.
[정답이 없어도 길은 있다.]
멋들어지게 쓴 손글씨였다.
"벌써 30년 전입니다. 야자 시간에 도망가려던 저에게 환타 한병과 함께 써주셨던 글귀입니다."
"허허, 기억나지. 그때 네 놈 눈빛이 하도 불안해 보여서 잡아다가 환타 한 병 먹였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내 딸내미 도둑질을 했던겐가?"
"아빠도 참! 희수가 도둑 이라니, 내가 좋아서 쫓아다녔다니까?"
예진이 눈을 흘기자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래도 자네가 그때 그 말을 잊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줘서 고맙네. 덕분에 내 딸 굶기지는 않으니 다행이고."
"그때 선생님이 안 잡아주셨으면, 저는 오락실에서 스트리트파이터나 하다가 인생 'K.O.' 당했을 겁니다."
희수는 은사님이자 장인어른의 잔에 술을 채웠다.
초등학교 짝꿍이자 2,000원짜리 믹스 테이프를 나눠 듣던 짝사랑 소녀는 아내가 되었고, 길을 잃은 제자에게 등대가 되어주었던 은사님은 장인어른이 되었다. 이보다 더 기막힌 운명이 또 있을까?
[최종회 예고]
"입영장정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민간인도 군인도 아닙니다. '장정'이라는 이름으로 3박 4일 동안 머무르며 군인이 되는 길을 갈 것입니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 푹 눌러쓴 야구 모자. 그리고 모래알을 씹는 듯한 마지막 춘천 닭갈비.
부모님과 여자친구의 젖은 눈시울을 뒤로하고 들어간 철문.
지금은 지도에서조차 사라진 곳. 하지만 대한민국 남자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눈물의 집결지'로 남아있는 그곳. 30년 전 오늘, 청춘이라는 열차가 잠시 멈추어 섰던 곳. 춘천 102 보충대의 추억이 전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