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이 되기 위한 3박 4일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그때 그 시절 상식: 춘천 102 보충대
위치 및 역할: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에 위치했던 육군 부대. 강원도 전방 부대(제1야전군)로 배치되는 장정들이 3박 4일간 머무르며 피복을 지급받고 대기하던 곳입니다.
야외 돌계단의 추억: 입소식은 실내 강당이 아닌 연병장 스탠드, 일명 '야외 돌계단'에서 치러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겨울 입대 장병들은 칼바람을 맞으며 딱딱한 돌바닥에 앉아 이별의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역사 속으로: 1951년 창설되어 연간 4~5만 명의 장병을 배출했으나,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2016년 11월 1일 공식 해체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2015년 9월, 추석 명절.
오랜만에 온 가족이 희수네 거실에 모여 앉았다. 송편을 집어 먹으며 무심코 켠 TV에서는 복면을 쓴 가수가 노래 대결을 펼치고 있었다.
"야~ 저 목소리 딱 봐도 김영철인데? 김영철 아닌 게 더 이상하다."
막내 삼촌 진우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때, TV 속 가수가 가면을 벗고 부른 노래가 거실의 공기를 바꿨다.
"어색해진 짧은 머리를~ 보여주긴 싫었어~"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삼촌, 근데 이 노래는 왜 이렇게 슬프게 들릴까요? 군필자들의 영원한 눈물 버튼이라던데."
희수가 묻자, 큰삼촌 진구가 소주잔을 내려놓으며 혀를 찼다.
"이 녀석아, 그게 바로 '짬밥'의 맛이라는 거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도 마찬가지고. 전주만 나와도 속이 쓰리지."
희수는 베란다 창밖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이 노래 들으니까 딱 20년 전, 저 입대할 때 생각나네. 그때 엄마가 데려다주셨는데. 엄마 친구 지율이 엄마랑 같이..."
희수의 시선이 1995년의 그 차가웠던 겨울로 향했다.
1995년 12월 5일.
기말고사가 한창이던 대학 캠퍼스를 뒤로하고, 희수는 머리를 짧게 깎았다. 유난히 바람이 매서운 날이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라지만, 막상 닥쳐온 현실 앞에서는 두려움이 앞섰다.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의 그늘을 벗어나, 철조망 쳐진 낯선 곳에서 지내야 하는 공포감도 동반되었다.
희수의 손에는 [춘천 102 보충대 - 14시까지 입영]이라고 적힌 영장이 구겨질 듯 들려 있었다.
춘천으로 가는 도로는 야속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뒷좌석에 앉은 희수와 어머니 영숙의 눈에는 창밖 풍경 대신 근심만 가득 차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지율이 엄마가 백미러를 보며 분위기를 띄우려 애썼다.
"요새 군대 많이 좋아졌대. 영숙아, 너무 걱정 마. 희수야, 그냥 눈 딱 감고 학교 다시 다닌다고 생각해. 너 끈기 있잖아. 잘할 거야."
하지만 그 위로가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낮 12시 정각, 춘천.
입소 전, 마지막 '사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 춘천의 명물이라는 닭갈비 식당에 들어갔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붉은 고기 냄새가 진동했지만, 희수의 입안은 바짝 말라 있었다.
밥은 모래알을 씹는 것 같았고, 닭갈비는 젖은 종이 같았다.
"더 먹어. 잘 먹어야 훈련도 잘 받지."
어머니가 덜어준 고기를 억지로 물과 함께 삼켰다. 맛은 기억나지 않았다. 오직 목구멍이 막히는 답답함뿐.
오후 1시 50분.
드디어 헤어질 시간. 위병소 앞, 어머니 영숙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희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며 뒤를 돌았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걱정 말고 푹 주무세요. 충성!"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도망치듯 정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우리가 상상했던 따뜻한 강당이 아니었다. 연병장 한쪽에 마련된 야외 돌계단이었다.
칼바람이 사정없이 들이닥치는 그곳에, 사복 차림에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수천 명의 청춘들이 빽빽하게 앉아 있었다.
엉덩이로 전해지는 돌바닥의 차가운 냉기. 살을 에는 12월의 춘천 바람.
희수는 얇은 점퍼 깃을 여미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옆에 앉은 동기들도 추위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처량하고 살벌한 풍경 속에서 희수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어? 영철이 형?"
재수할 때 학원에서 같이 도시락 까먹던 한 살 위 형이었다.
"어, 희수야! 너도 오늘이냐? 야, 진짜 춥다... 재수 학원 동기에 군대 동기까지... 인연 참 질기다, 하하."
반가움도 잠시, 단상 위 조교의 서슬 퍼런 불호령이 스피커를 찢고 나왔다.
"동작 그만! 잡담하지 않습니다! 고개 숙이지 마! 전방 주시!"
찬바람을 맞으며 부동자세로 앉아있는 수천 명의 장정들.
"여러분은 지금부터 민간인도, 군인도 아닙니다. '장정'이라는 이름으로 3박 4일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군인이 되는 훈련을 받을 것입니다."
민간인도 군인도 아닌 존재, 장정.
그렇게 혹한의 돌계단 위에서 희수의 사회 물은 꽁꽁 얼어붙어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
내무실로 이동해 군용 보급품을 받고, 국방색 군복으로 갈아입으니 제법 군인 티가 났다. 침상 위에는 누런 택배 박스와 편지지가 놓여 있었다. 사회에서 입고 온 옷과 신발, 그리고 미련들을 저 박스에 담아 집으로 보내는 의식.
희수는 펜을 들었다.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이 지났고, 이제 정말 부모님 품을 떠났다는 실감이 났다. 걱정하고 계실 부모님 생각에 목이 메었지만, 꾹꾹 눌러 담담하게 적어 내려갔다.
'아버지, 어머니.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고 박스를 테이프로 봉하여 복도에 내놓는 순간, 희수는 깨달았다. 이제 더 이상 어리광 부리던 민간인 유희수는 없다는 것을.
3박 4일간의 '민간인 지우기'가 끝나고, 자대 배치를 받는 날.
대부분 버스에 올랐지만, 희수와 영철 형을 포함한 일부 인원은 짐짝처럼 육군 트럭(두돈반)에 실려 어딘가로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소양강 선착장이었다.
강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선착장에서 인솔 간부가 잔인한 말을 던졌다.
"여기가 너희들이 사제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있는 마지막 장소다. 배 들어올 때까지 매점에서 맘껏 사 먹어라!"
"배라고? 도대체 우리를 어디다 팔아먹으려고 배를 태운대?"
동기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야... 배 타고 들어가면 양구래. 백두산 부대."
군인들 사이에서 구전동화처럼 내려오던 그 노래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걱정 마라 '양구'가 있단다."
인제와 원통을 뛰어넘는,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그곳. 양구.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소양강을 가르는 배에 오르며, 희수의 파란만장한 군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때 진짜 우리 희수가 보낸 소포 받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어머니 영숙의 말에 희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에이, 군대가 무슨 벼슬이라고. 나 때는 말이야~"
진구와 진우가 군대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자자. 군대얘기는 그만하시고 소주나 한잔 더 하시죠.!"
비록 희수의 청춘을 받아주었던 102 보충대는 1년 후인 2016년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날 야외 돌계단에서 느꼈던 뼛속 시린 냉기와 닭갈비의 맛, 그리고 배를 타고 들어가던 막막함은 희수의 가슴속에 훈장처럼 남아 있었다.
2025년 12월.
어느덧 세월이 흘러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희수는 문득 지난 시간 동안 그들끼리 공유했던 10가지를 회상하며 말한다.
"우리가 추억했던 10가지 중에... 다시 부활했으면 좋겠는 거 있어?"
희수가 씩 웃으며 아내 예진을 바라봤다.
"나는... 비디오 대여점이 부활했으면 좋겠는데. 예진이 너는?"
"왜? 또 그 예쁜 아르바이트 누나 생각나서?"
예진의 날카로운 도발에 삼촌들이 박장대소하며 희수의 등짝을 팡팡 두들겼다.
희수는 억울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외쳤다.
"아니지! 거기서 만난 못생긴 여학생이 보고 싶어서 그러지."
"어머, 이 남자가 진짜!"
거실 가득 온 가족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사라진 것들은 슬프지만, 그것을 함께 기억하고 웃어줄 가족이 곁에 있어 더없이 행복한 밤이었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예우"
1981년,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국민학생 희수부터,
1995년 12월, 차가운 춘천행 자동차애 몸을 싣던 청년 희수까지.
거기에 달밤에 바지까지 찢어져 가며 통금 시간을 지키기 위한 진구
공중전화와 치열한 사투를 벌였던 진우의 이야기는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거나, 혹은 서서히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물건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냈던 분들에게는 가슴 저릿한 '향수'를 선물하고 싶었고, 그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분들에게는 "아, 우리 부모님과 삼촌, 이모들이 이렇게 뜨겁게 살아오셨구나"라는 작은 공감의 창을 열어드리고 싶었습니다.
비록 물건은 사라졌지만, 그 안에 담긴 우리의 시간과 추억만큼은 영원히 유효하니까요.
총 10개의 전시품(에피소드)을 끝으로, <사라지는 것들의 박물관>은 잠시 '휴관'에 들어갑니다.
박물관 문을 닫는 동안, 저는 창고 깊숙한 곳을 더 뒤져보려 합니다. 더 먼지 쌓이고 손때 묻은, 그래서 더 반가운 추억의 아이템들을 수집해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 함께 울고 웃어주신 관람객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작가 유블리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