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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DJ 형! 말 좀 그만해요!"

공테이프 녹음으로 멘털이 무너진 희수의 다음 노선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길보드와 믹스 테이프


1. 라디오 녹음과 DJ의 횡포(?)

손가락 신공: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재빨리 'REC(녹음)' 버튼과 'PLAY' 버튼을 동시에 눌러야 했습니다. 타이밍을 놓치면 앞부분이 잘리기 일쑤였죠.

DJ의 멘트: 녹음의 가장 큰 적은 DJ였습니다. 전주(Intro)나 후주(Outro) 부분에 DJ가 날씨 이야기나 사연을 읽으며 노래를 덮어버리면(오버랩), 애써 한 녹음을 망치게 되어 아이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2. 길보드 차트와 편집 앨범
길보드: 미국의 '빌보드'를 빗댄 말로, 리어카나 레코드 가게에서 파는 불법 복제 테이프의 인기가 곧 진짜 인기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장님 표 믹스 테이프: 저작권 개념이 희미하던 시절, 레코드 가게 주인이 LP나 CD에서 인기곡만 골라 공테이프에 녹음해 팔았습니다. 단돈 2,000원에 최신 인기가요를 몽땅 들을 수 있어 학생들에게는 가성비 최고의 아이템이었습니다.


"어후, 먼지 좀 봐. 자기는 뭘 이렇게 못 버리고 사니?"


비디오 가게 회원카드를 발견했던 이사 박스 밑바닥에서, 이번에는 낡은 신발 상자가 나왔다. 예진이 상자를 열자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케이스들이 쏟아져 나왔다.


[SKC], [TDK], [SUNKYONG]...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든 카세트테이프들. 그런데 정식 가수의 앨범 재킷이 아니었다. 속지(인덱스카드) 옆면에는 매직이나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투박한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90' 겨울 발라드 모음] [신해철 & 015B] [희수 꼬. 건들지 마라]


"푸하하! '희수 꼬'래. 글씨체 봐라. 근데 이건 무슨 가요톱텐이야? 제목이 왜 다 이래?"


예진의 놀림에 희수가 황급히 테이프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매직 냄새가 다 날아간 낡은 종이. 하지만 그 안에는 1990년, 중3 희수의 겨울방학을 뜨겁게 달궜던 실패와 열정이 잠들어 있었다.



1990년, 겨울 어느 밤 10시 5분. 희수의 방 안에는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희수는 책상 앞에 앉아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카세트 플레이어의 'REC(녹음)' 버튼 위에 검지 손가락을 올려두고 있었다.


"제발... 오늘은 틀어줘라, 문세 형!!.“


희수의 목표는 단 하나. 요즘 최고로 뜨고 있는 신해철의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를 녹음하는 것이었다. 며칠째 대기 중이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자, 다음 곡입니다. 많은 분이 신청해 주셨네요. 신해철이 부릅니다."


왔다! 희수는 숨을 멈추고 전주가 시작되는 찰나의 순간, 'REC'과 'PLAY' 버튼을 동시에 꾹 눌렀다. '철컥-'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잡음 없이 깨끗하게 테이프에 감기기 시작했다.


"이 세상 살아가는 이 짧은 순간에도... 우린 얼마나 서로를..."


완벽했다. 신해철 형님의 마왕 같은 미성이 방 안을 채웠다. 희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대로 끝까지만 가면 성공이다. 노래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감미로운 후주(Outro)로 접어들었다.


'좋아, 10초만... 10초만 더 버티면...'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음악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DJ 별밤지기 이문세 아저씨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네~ 신해철의 노래였습니다. 아, 오늘 밤 눈 소식이 있네요. 내일 등굣길 조심하시고요, 3부 광고 듣고 오겠습니다!"


"아악! 안 돼! 형! 말하지 마! 제발!"


희수가 비명을 질렀지만 야속한 DJ 형님은 멘트를 멈추지 않았고, 급기야 경쾌한 광고 음악(잠깐만~ 우리 이제 함께해 봐요. 사랑을 나눠요.) 이 신해철의 감성을 와장창 깨뜨려버렸다.


"아... 진짜! 거기서 날씨 얘기를 왜 해!"


희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녹음 버튼을 껐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테이프에는 노래 대신 희수의 절규만 녹음되었을 터였다. 희수는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 DJ와의 싸움에서 스트레스받을 수 없었다.


"안 되겠다. 돈을 쓰자. 돈을 써."


다음 날, 희수는 동네 번화가 입구의 '소리사(社)' 레코드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안은 정품 앨범을 사는 사람들보다, 카운터 옆 '바구니'를 뒤적이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그 바구니에는 비닐 포장도 없는 소위 '짜깁기 테이프(믹스 테이프)'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저씨, 여기 신해철이랑 공일오비 노래 있어요?"


희수가 묻자, 아저씨가 안경을 고쳐 쓰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LP판에서 엑기스만 뽑아서 직접 뜬 거야. 잡음? 그런 거 일절 없다.“

아저씨가 카운터 뒤쪽의 오디오 데크를 가리켰다. 거기엔 최신 앨범과 인기 앨범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빨간 불이 들어온 데크 두 대가 쉴 새 없이 돌아가며 복제판을 찍어내고 있었다.


"앞면은 015B고, 뒷면은 신해철 넣었다. '슬픈표정 하지말아요'는 1번이다. 요즘은 이게 대세야.“


정품 앨범은 4,500원. 하지만 이 '불법 모음집'은 단돈 2,000원. 저작권? 그런 단어는 사전에나 있었다. 오직 사장님의 '고음질 복제 기술'과 '선곡 센스'만이 법이었다.


희수는 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세 장을 꺼냈다. [신해철 & 015B]. 하얀색 공테이프 속지에 아저씨가 검은색 모나미 볼펜으로 직접 곡목을 써넣은 에디션.


"이거 하나 주세요. 아, 그리고 건전지도 두 개요."


테이프를 손에 넣은 희수는 떡볶이집이 아니라 독서실로 향했다. 독서실 휴게실에 있을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휴게실 자판기 앞, 예진이 종이컵 율무차를 호호 불며 마시고 있었다. 희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마이마이(MyMy)' 카세트 플레이어를 꺼냈다. 그리고 방금 산 따끈따끈한 테이프를 넣었다.

딸깍.


"어? 희수야."


"어... 예진아. 공부 안 해?"


"머리 좀 식히려고. 너는?"


희수는 대답 대신 이어폰 한쪽을 예진에게 쑥 내밀었다.


"나 이거 새로 산 건데... 들어볼래? 요즘 엄청 뜨는 노래래."


예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피식 웃으며 이어폰을 받아 귀에 꽂았다. 희수가 떨리는 손으로 'PLAY' 버튼을

눌렀다. '치이익-' 하는 테이프 돌아가는 잡음(화이트 노이즈)이 잠시 흐르고, 쓸쓸한 키보드 전주가 흘러나왔다.


015B(공일오비)의 <텅 빈 거리에서>.


"내 곁에 머물러줘요... "


객원 보컬 윤종신의 풋풋하고 미성 섞인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좁은 휴게실, 이어폰 줄 하나로 연결된 두 사람. 왼쪽 귀와 오른쪽 귀로 같은 슬픔이 흘러들어왔지만, 희수의 심장은 노래와 정반대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떨리는 수화기를 들고... 너를 사랑해..."


가사 속 주인공은 공중전화 부스에서 이별을 고하고 있었지만, 희수는 그 '너를 사랑해'라는 가사에 자신의 마음을 실어 보내고 싶었다.


희수는 노래를 듣는 척하며 예진을 힐끔 쳐다봤다. 예진이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와... 노래 진짜 좋다. 목소리가 너무 슬픈데? “


"그렇지? 가사는 슬픈데... 난 이 부분이 제일 좋더라."


희수의 말에 예진이 싱긋 웃었다. B면으로 넘어가기 위해 테이프를 꺼내 뒤집는 그 짧은 정적조차 설레던 시간. 가수 이름도, 가사도 적혀 있지 않은 투박한 손글씨 테이프였지만, 그 안에는 15살 소년의 풋사랑이 고음질로 녹음되어 있었다.




"야, 이거 기억나? 내가 그때 너한테 신해철이랑 공일오비 노래 들려줬잖아."


희수가 테이프 하나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볼펜 글씨는 번져 있었지만, [신해철 -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라는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기억나지. 너 그때 엄청 씩씩거리면서 왔잖아. 라디오 녹음하다가 DJ가 말 시켜서 망했다고."


"그랬지... 내 2,000원이 고스란히 들어간 테이프였다고, 이게."


예진이 웃으며 신발 상자 구석에서 몽당연필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프 구멍에 끼워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뭐 해?"


"테이프 늘어졌나 확인해 보게. 옛날에 이거 감는 맛이 있었는데.“


사각, 사각. 연필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자기야, 우리 집에 카세트 플레이어 없나?"


"버린 지가 언젠데. 왜? 듣고 싶어?"


"아니... 그냥. 오랜만에 마왕 목소리 듣고 싶어서. 잡음 섞인 그 소리 말이야."


"아이고, 감성 찾지 말고 청소기나 돌리세요, 1004번 아저씨!“


희수는 투덜거리며 청소기를 집어 들었고, 예진은 연필이 꽂힌 테이프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지금은 노래 끝부분에 DJ가 난입하는 일도, 잡음 때문에 테이프를 다시 감을 일도 없는 깨끗한 디지털 세상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립다. 'REC' 버튼을 누르며 숨죽이던 그 긴장감이. 레코드가게 아저씨의 투박한 손글씨 리스트를 보며 "녹음 잘 되었겠지?" 기대하던 그 순간이 있는 낭만이 있었다.


희수는 오늘따라 마왕의 목소리가 더욱 그리워진다.



[다음 편 예고]


1993년, 대한민국 입시 역사상 가장 뜨겁고 혼란스러웠던 해. 수학(數學) 인지 수학(修學)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던 첫 실시된 '대학수학능력시험' 이야기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해에 두번 시험을 치르는 94학번.


전교 1등이 재수를 결심하고, 찍기 실력 좋은 녀석이 대학을 간다던 혼돈의 시대. 8월에 한 번, 11월에 한 번. 두 번의 기회를 줬지만 두 배로 고통스러웠던 그해. 1993년 고3 교실 방황하던 희수와 야자 땡땡이를 막아세운 선생님과의 숨막힌 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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