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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누나! 영웅본색 2 나왔어요?

비디오 가게 누나와의 수상한 거래

by 유블리안


그때 그 시절 상식: 비디오 대여점과 장국영 신드롬


1. 동네의 멀티플렉스, '비디오 대여점'

회원가입의 필수 조건: 주민등록증(또는 학생증)과 '집 전화번호'가 필수였습니다. 연체 시 집으로 독촉 전화를 걸었기 때문에 거짓 정보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검은 비닐봉지의 비밀: 대여점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미성년자 관람불가(일명 빨간딱지) 비디오나, 남들이 보면 민망한 제목의 책을 빌릴 때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검은 봉지에 싸주는 것이 국룰이자 '센스'였습니다.
빨간 자동차 (되감기 기계): 비디오를 다 보고 나면 반드시 **'되감기'**를 해서 반납하는 것이 매너였습니다. 이를 위해 가정마다 빨간색 스포츠카 모양의 전용 되감기 기계를 하나씩 구비해 두곤 했습니다.
2. 영원한 별, '장국영'

홍콩 누아르의 아이콘: 1980년대 후반, 영화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이 대히트를 치며 주윤발, 왕조현과 함께 한국 청소년들의 우상이 되었습니다. 2003년 4월 1일 만우절날 거짓말처럼 하늘에 별이 되어 많은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투유(To You) 초콜릿: 장국영이 출연한 오리온 '투유' 초콜릿 CF는 그야말로 신드롬이었습니다. 그가 부른 CM송과 우수에 찬 눈빛 때문에 초콜릿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으며, 밸런타인데이 선물 1순위였습니다.


"아, 벌써 세월이 이렇게 됐네... “


4월의 어느 저녁, 뉴스를 보던 예진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TV 화면 속 앵커가 차분한 목소리로 멘트를 하고 있었다.

"네, 오늘은 '거짓말처럼 떠난 별', 배우 장국영 씨의 기일입니다.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의 추모 물결이... “


자료 화면으로 영화 <아비정전>의 맘보춤 장면과 <영웅본색>의 한 장면이 흘러나왔다. 예진은 턱을 괴고 화면 속 장국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진짜 잘생겼다... 내 첫사랑이었는데. 저 눈빛 봐,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사연 있게 생겼지?"


"치, 잘생기긴. 그냥 좀 반반하게 생긴 거지."


소파에 누워 있던 희수가 괜히 입을 삐죽거렸다. 예진이 어이없다는 듯 희수를 흘겨봤다.


"어머, 질투해? 자기랑은 차원이 다른 미모거든요? 내가 중학교 때 저 오빠 보려고 비디오 가게를 얼마나 들락거렸는데."


"흥, 너만 그랬냐? 나도 장국영 형님 보려고 학원 째고 비디오 가게 출근 도장 찍었어. 봐라, 이게 내 훈장이다."


희수는 지갑을 열어 깊숙한 곳에 꽂혀 있던 낡은 코팅 종이 한 장을 꺼내 예진의 눈앞에 흔들었다.


"[할리우드 비디오·도서 대여점 - 회원번호 1004번 유희수]. 보여? 1004번. 이게 아무나 주는 번호가 아니야. VIP급 단골한테만 주는 거라고."


"어머, 이걸 아직도 갖고 있어? 징하다, 징해."


예진이 낡은 회원카드를 보며 킬킬거렸다. 희수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뉴스의 배경음악으로 'To You...' 하는 멜로디가 흘러나오자, 희수의 기억은 자연스럽게 1989년, 장국영 형님이 온 세상을 지배하던 그 시절로 되감기 되었다.

1989년, 늦가을. 중학교 2학년 희수의 하굣길은 언제나 동네 어귀 '할리우드 비디오·책 대여점'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면 훅 끼쳐오는 묘한 냄새. 비디오 데크의 뜨끈한 기계 열기와, 수천 권의 만화책에서 나는 쿰쿰한 갱지 냄새가 섞인 그곳만의 향기였다.


좌측 벽면은 형형색색의 비디오테이프가 요새처럼 쌓여 있었고, 우측은 만화책이 꽂힌 회전 책장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아이들의 천국이었다.


카운터에는 긴 생머리에 라디오 팝송을 흥얼거리는 대학생 누나가 있었다. 희수는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카운터로 돌진했다.


"우리 예쁜 누나! <영웅본색 2> 들어왔어요?"


누나가 고개를 들어 희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어, 희수 왔니? 1004번? 넌 만화책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늘도 영웅본색 타령이구나."


"아, 제발요. 오늘 들어온다고 했잖아요. 저 이거 보려고 학교 끝나고 바로 뛰어 왔단 말이에요. 땀 흘리는 거 보이죠?"


희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장국영 형님처럼 처연한 눈빛을 발사했다. 누나는 장부를 뒤적거리더니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들어오긴 했는데... 너 이거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인 거 알지?"


누나가 희수의 명찰을 톡 치며 짓궂게 웃었다.


"너 빠른 76이라며. 그럼 지금 만으로 열네 살도 안 된 꼬맹이잖아. 고등학생 형들도 학생증 내고 빌려 가는데, 중학생한테 이걸 어떻게 빌려줘? 사장님한테 걸리면 나 혼나. “

정곡을 찔린 희수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유희수가 아니었다. 그는 당당하게 받아쳤다.


"에이, 누나. 저 정신연령은 이미 고3이에요. 그리고 제 키 좀 보세요. 누가 이걸 중학생으로 봐요?" (사실 희수는 까치발을 하고 있었다.)


"어머, 얘 좀 봐? 말은 청산유수네."


누나가 비디오를 도로 집어넣으려 하자, 희수는 주머니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당시 없어서 못 판다는 장국영의 '투유(To You) 초콜릿'. 희수는 떨리는 손을 감추고, 최대한 무심하게 초콜릿을 카운터 위로 쓱 밀었다.


"누나 드세요. 공부하느라 힘들잖아요."


"어머? 이거 요즘 구하기 힘든 건데... 나 주는 거야?"


"뇌... 아니. 그냥 오다 주웠어요." (용돈을 탈탈 털어 3일 만에 구한 것이었다.)


희수의 당돌하고 귀여운 행동에 누나가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알았어, 이 꼬맹이 신사분. 초콜릿 봐서 내가 특별히 눈감아준다. 대신 조건 있어. “


누나는 비디오를 속이 비치지 않는 검은 비닐봉지에 두 번 꽁꽁 싸서 건넸다.


"가다가 형들한테 뺏기지 말고, 집에 가서도 아빠 없을 때 방문 걸어 잠그고 봐. 소리 너무 크게 틀지 말고. 알았지?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이다? “


'둘만의 비밀'. 그 단어가 주는 달콤함은 초콜릿보다 진했다.

희수는 검은 봉지를 소중하게 품에 안고 씩 웃었다.


"걱정 마세요.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잖아요. 이쁜 누나 고마워요!"


희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게를 뛰쳐나왔다. 등 뒤에서 "희수야, 키 좀 더 크고 와라!" 하는 누나의 놀림 섞인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발걸음은 이미 홍콩의 밤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근데 여보. 그거 알아?"


TV에서 눈을 뗀 예진이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뭐를?"


"나도 그 가게 단골이었거든. 그 언니가 나한테만 신작 순정만화 먼저 빼주곤 했는데. 그때 맨날 카운터 앞에서 얼쩡거리던 겉멋 든 중학생 하나가 있었단 말이지."


희수가 움찔하며 예진을 쳐다봤다.


"설마... 너 나 봤어?"


"글쎄? 난 <유리가면> 빌려 보느라 정신없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걔가 키 작은 거 들키기 싫어서 까치발 들고 서 있던 건 기억나네. 맨날 예쁜 누나 타령이었지 아마. 그게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 호호호"

"야! 나 키 안 작았어! 그리고 까치발 아니고... 운동화가 높았던 거야!"


희수가 발끈하자 예진이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래. 알았어. 너라고 안 했는데 왜 찔려하지? 오늘은 내가 특별히 라면 끓여준다. 장국영 오라버니 추모 기념으로."


"오, 진짜? 웬일이야 강예진 여사님이?"

"대신 설거지는 자기가 해. 회원번호 1004번 아저씨."

부부는 다시 TV 속, 영원히 늙지 않는 장국영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스마트폰 하나면 뭐든 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희수는 가끔은 그립다. "고등학생 관람가"라는 금기의 벽을 넘기 위해 예쁜 누나에게 초콜릿을 바치던, 그 시절 우리의 순수하고 당돌했던 마음이.

"누나, 그거 들어왔어요?"


"이거 너만 봐!"


그 한마디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던, 그들의 1989년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금은 침대에 누워 리모컨 버튼 하나만 누르면 전 세계의 영화가 쏟아지는 세상이다. 인공지능이 내 취향을 분석해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화"를 추천해 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스크롤만 30분째 내리다 결국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잠들곤 한다.

그 시절, 우리는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매고 집을 나섰다. 누군가 먼저 빌려 갔으면 어쩌나 조바심을 냈고, 운 좋게 보고 싶던 비디오를 손에 넣었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다. 속이 비치지 않는 검은 비닐봉지는 단순한 포장지가 아니라, 꿈과 환상이 담긴 보물단지였다.

비디오 데크가 '철컥' 하고 테이프를 삼킬 때의 기계음, 브라운관에서 뿜어져 나오던 따뜻한 열기, 그리고 다음 사람을 위해 빨간 자동차 기계로 테이프를 '되감기' 하던 그 소소한 배려까지.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해진 지금, '빨리 감기' 버튼만 있는 세상 속에서 가끔은 그 투박했던 아날로그의 시간으로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싶어진다. 영원히 늙지 않는 우리의 영웅들이 살아 숨 쉬는 그 시절로 말이다.



[다음 편 예고]


"아저씨, 이번에 나온 '최신 댄스' 좋아요?"


레코드 가게 카운터 옆, 가장 잘 보이는 명당자리. 유명 가수의 정품 앨범보다 더 불티나게 팔리던 정체불명의 테이프들이 있었다.


[90 최신 인기가요], [겨울 발라드 모음] 투박한 손글씨로 적힌 제목, 저작권 따위는 쿨하게 무시하고 사장님의 '절대 미각' 선곡 센스로 꽉꽉 채워 넣은 알짜배기 불법(?) 테이프.


그 어떤 정규 앨범보다 알찼던, 레코드 가게 사장님 표 믹스 테이프의 추억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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