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의 36번째 사진에는 소중한 무언가가 숨어있다.
그때 그 시절 상식: 필름 카메라와 현상소
기간: 1980년대 ~ 2000년대 초반 (디지털카메라 대중화 이전)
특징: 필름 한 통에 24장 혹은 36장(보너스 포함 38장)만 찍을 수 있어 셔터 한 번이 매우 귀했습니다. 찍은 후에는 바로 확인할 수 없었고, 필름을 다 쓸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현상소(사진관): 촬영을 마친 필름을 사진관에 맡기면 약품 처리(현상)와 인화 과정을 거쳐 2~3일 후에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추억: 눈을 감거나 초점이 나간 '망한 사진'도 필름 값과 인화비를 내고 찾아야 했습니다. 봉투를 열어볼 때의 그 떨림은 필름 시대만의 특권이었습니다.
"야, 유희수. 너 솔직히 불어라."
"뭐를?"
"너 아직도 그 사진 부적처럼 들고 다니지? 6학년 봄 소풍 때 내가 찍어준 거."
철우의 기습 질문에 맥주를 마시던 희수가 쿨럭거렸다.
"무... 무슨 사진! 다 갖다 버렸어."
"에이, 거짓말. 너 술 취하면 보여주면서 히죽거리잖아. 빨리 꺼내 봐. 여기 못 본 애들도 있다."
친구들이 "보여줘! 보여줘!" 하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희수는 "아, 진짜 귀찮게 하네..."라고 투덜거렸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그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보물 1호'라는 폴더에 저장된 사진 한 장을 띄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자, 실컷 봐라 봐.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ㅋㅋ"
스마트폰 화면 속에 빛바랜 1987년의 봄이 떠올랐다. 인화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은 거지만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나왔다.
어린이대공원 분수대 앞, 촌스러운 청청 패션을 입은 까까머리 소년과 단발머리 소녀. 소년은 잔뜩 긴장해서 '차렷' 자세로 얼어있고, 소녀는 활짝 웃으며 브이(V)를 그리고 있는 사진.
"푸하하하! 야, 유희수 표정 봐라. 누가 총 겨누고 있냐? 왜 이렇게 쫄았어?"
"옆에 있는 게 누구야? 와, 미모 장난 아닌데?"
"이게 바로 우리 반 여신, 강예진 아니냐!"
친구들의 놀림에 희수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사진 속 단발머리 소녀. 6학년 2반의 공식 여신이자, 희수의 심장을 멋대로 폭행하고 다니던 첫사랑, '강예진'이었다.
희수의 가방 속에는 아버지의 보물 1호인 '자동필름카메라'가 모셔져 있었다. 하지만 희수의 신경은 온통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바로 노란색 손수건을 목에 맨 짝꿍 예진이었다.
'졸업하기 전에... 꼭 같이 찍어야 하는데.'
전설의 주먹왕 골목대장인 희수였지만, 예진이 앞에서는 순한 양, 아니 말 못 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남은 필름은 이제 딱 한 장, 36번째 컷만 남아 있었다. 희수는 이 마지막 한 방을 위해 친구들이 "한 장만 더 찍어줘"라고 사정해도 "필름 다 떨어졌다"며 거짓말을 해왔던 터였다.
희수는 눈치 없는 철우를 옆구리로 쿡 찔렀다.
"(소곤소곤) 야, 박철우. 나 예진이랑 한 장만 박아줘라."
"뭐? 네가 가서 찍자고 해."
"아, 쪽팔리게 사나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 네가 자연스럽게 분위기 좀 잡아봐!"
결국 철우가 총대를 멨다.
"야, 강예진! 여기 배경 죽인다. 너 희수랑 서 봐. 졸업 앨범엔 이런 게 안 실리잖아. 내가 한 방 박아줄게."
예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희수를 쳐다봤다. 희수는 짐짓 관심 없는 척 먼 산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뭐, 필름이 딱 한 장 남아서 버리긴 아깝고... 정 찍으라면 찍어주지."
예진이 까르르 웃으며 희수 옆으로 다가왔다.
"그래? 그럼 영광이지. 우리 짝꿍이랑 사진도 찍고."
분수대 앞. 예진이 옆에 서자 희수의 심장은 88 열차보다 더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샴푸 냄새인지 비누 냄새인지 모를 향긋한 향기가 희수의 코끝을 스쳤다. 희수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손을 주머니에 넣어야 할지, 차렷 자세를 해야 할지 몰라 뚝딱거렸다.
"야, 유희수! 좀 웃어! 인상 쓰지 말고!"
"시끄러워! 빨리 찍기나 해! 필름 아까우니까!"
철우가 뷰파인더를 들여다봤다. 희수는 속으로 외쳤다. '제발 흔들리지 마라. 눈 감지 마라. 제발...'
"하나, 둘, 셋! 김~치!"
찰칵-
지이잉- 드르륵, 드르륵.
셔터 소리와 함께 필름이 자동으로 되감기는 소리가 났다. 36번의 기회가 모두 끝났음을 알리는 소리이자, 희수의 1987년 봄이 네모난 필름 속에 영원히 박제되는 순간이었다.
3일 뒤, 사진관에서 찾아온 사진을 보고 희수는 이불을 걷어찼다.
사진 속 자신은 너무나도 뻣뻣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옆의 예진이는 햇살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희수는 그 사진을 앨범 제일 깊숙한 곳,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고 매일 밤 몰래 꺼내 보며 히죽거렸다.
"야, 근데 진짜 예쁜 '예진'이는 지금 뭐 하고 사냐? 시집갔겠지?"
"진짜 궁금하다. 강예진, 걔는 진짜 구름 위를 걷는 천사 같았는데."
"맞아. 그런데 어떻게 연락이 뚝 끊길 수가 있지?"
친구들의 호들갑에 희수가 마른안주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천사는 무슨. 걔 성격 장난 아니다. 화나면 호랑이 할아버지는 저리 가라야."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희수가 대답하려던 찰나, 호프집 문에 달린 종이 '딸랑-' 하고 요란하게 울렸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아, 일행 있어요. 저기 있네. 웬수덩어리."
다소 지치지만 앙칼진 목소리. 친구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로 쏠렸다.
헐렁한 카디건을 걸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급하게 들어온 여자. 한 손에는 핸드폰을 무기처럼 꽉 쥐고 있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 또렷한 눈매와 단발머리는 사진 속 소녀 그대로였다.
철우가 입을 떡 벌렸다.
"어...? 어어? 야, 저기... 설마 강예진 아니냐?"
친구들이 웅성거리는 사이, 예진이 성큼성큼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유희수에게 꽂혀 있었다.
"유희수 씨. 전화는 폼으로 들고 다녀? 애 둘 재우느라 진 빠져 죽겠는데, 남편이란 인간은 아주 신나셨네?"
순간, 호프집에 정적이 흘렀다.
전설의 주먹 유희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세상에서 가장 비굴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 아니... 여보. 그게 아니고. 시끄러워서 벨 소리를 못 들었어. 애들은? 잘 자?"
"겨우 재우고 나왔다. 너 차 키 내놔. 술 마셨지? 내가 운전할 테니까."
예진이 자연스럽게 희수의 외투 주머니를 뒤져 차 키를 낚아챘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철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야... 유희수. 너네 둘... 설마..."
희수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예진의 어깨에 슬며시 손을 올렸다.
"어. 소개할게. 내 첫사랑이자, 지금은 우리 집 서열 1위. 내 와이프 강예진이다."
"뭐어어어어?!"
친구들의 비명이 호프집을 가득 채웠다. 예진이 그제야 친구들을 둘러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은 1987년 봄 소풍 때, 사진 속에서 보여주었던 그 환한 미소 그대로였다.
"어머, 철우 안녕? 다들 오랜만이네. 우리 남편이 밖에서 내 욕하고 다닌 건 아니지?"
"와... 대박. 야, 유희수 너 진짜 인생 승리자다!"
"어쩐지 아까 사진 보면서 실실 웃더라니!"
친구들의 부러움 섞인 야유가 쏟아졌다. 희수는 "아,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라고 소리쳤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내려올 줄 몰랐다.
사진 속 잔뜩 얼어있던 까까머리 소년은 이제 넉살 좋은 남편이 되었고, 수줍게 브이(V)를 그리던 소녀는 등짝 스매싱을 날리는 씩씩한 아내가 되었다.
희수는 슬쩍 예진의 손을 잡았다. 거칠어진 손이었지만, 희수에게는 여전히 설레는 감촉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 찍은 사진은, 1987년 5월, 흔들리고 초점 나간 그 36번째 컷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지막 한 방'이 지금의 이 소란스럽고 행복한 현실을 만들어주었다는 것을.
"자, 강예진 여사님도 오셨으니 건배 다시 하자! 내 인생 최고의 홈런을 위하여!"
"아유, 주책이야 진짜. 빨리 마시고 집에나 가자. 위하여!"
호프집의 밤이 1987년의 봄날처럼 따스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스마트폰 갤러리에 수천 장의 사진이 담기는 지금, 필름 카메라는 이제 박물관 진열장이나 레트로 감성을 좇는 이들의 손에 들린 일회용 카메라로만 남게 되었다. 그마저도 일상을 기록하는 도구라기보다는, 잠시 옛 기분을 내보는 '추억의 아이템'이 된 지 오래다.
그 시절, 셔터를 누르는 검지 끝에는 묵직한 책임감이 실려 있었다.
한 장 한 장이 곧 돈이었고, 기회는 단 한 번 뿐이었기에 우리는 숨을 멈추고 신중하게 피사체를 담았다. 친구와 같은 사진을 나누어 가지려면 두 배의 인화비를 치러야 했기에, 나누어 가진 사진 한 장이 더욱 애틋하고 귀했다.
지금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1초 만에 삭제하고, 얼굴의 주름이나 잡티쯤은 보정 앱으로 감쪽같이 지울 수 있는 세상이다. 분명 더 편리해지고 화려해졌지만, 대상을 향해 숨죽이던 그 시절의 '간절함'과 '신중함'은 옅어진 것 같아 어딘가 씁쓸하다.
쉽게 찍고 쉽게 지우는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 불편해서 더 소중했고 수정할 수 없어 더 진실했던 필름 카메라의 투박한 진심이 유독 그리운 요즘이다.
[다음 편 예고]
"예쁜 누나, <영웅본색 2> 들어왔어요?"
중학생이 볼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볼 수 있었던 나만의 방법.
금요일 하굣길,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 우리가 꼭 들러야 했던 그곳. 비디오대여점
문을 열면 훅 끼쳐오는 비디오테이프, 만화책 특유의 냄새
벽면 가득 꽂힌 형형색색의 비디오 케이스들 사이에서 보물을 찾던 설렘을 기억하시나요?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오던 장국영, 주윤발 형님.
그리고 우리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말, "연체료"와 "되감기".
호환, 마마보다 무서웠던 연체료의 추억 속으로 되감기(REW) 버튼을 눌러볼까요?